소아를 넘어 두루 이익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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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해스님 작성일03-06-12 00:00 조회5,215회 댓글0건본문
만산홍엽이 낙엽으로 뒹구는가 하면
길게 늘어진 그림자 사이에 멈춤이 없는
시간의 흐름이 있습니다.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삼라만상을 통해 일상의 생생한 법문을 설합니다.
세상의 환한 등불이신 여래께서 짐짓 보여 주시고
말해 주시는 법문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탓에
우리 스스로 만추의 그림자 깊이만큼 어두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도 모릅니다.
“여래는 세상의 등불이니 모든 덕을 원만히 이룩하고
더없이 훌륭한 복밭이 되어 중생 모두를 청정하게 하나니…….”
이 게송은 화엄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문득 세상사를 보노라면, 모든 사람들이
내 자신만 잘 살려고 하고 다른 이를 짓밟고
나만이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소아적 이기주의가 자리하는 한에는
이 세상은 영원히 수라요, 지옥이요,
갈등과 투쟁의 고통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부처님은 투쟁의 요소가 되고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부처님은 가만히 있어도
왕좌에 오를 수 있는 자리를 스스로 버리셨고
인류에게 참된 평화가 무엇인가 그리고 행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밝히시기 위해 수도의 길을
가신 분입니다. 마침내 각고의 수행 끝에 깨침을
성취하시어 참된 평화와 행복의 큰길을 열어 보이시고
천인(天人)의 스승으로 모든 사람들의 복밭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복을 심으면 그대로 얻을 수 있는
그런 밭이 되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깨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현상세계의
본질과 내 자신의 정신적 본질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근본을 외면하고 항상 내 육체적 감각이나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변화하는 현상에만 집착하고 욕망에만
사로잡힌다면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방송에 우리 나라 사람이 술을 제일 많이
마신다고 하더군요. 또한 술 마신 뒤의 행동이
제일 못쓴다는 겁니다. 술도 한두 잔 먹었을 때는
그것이 술로만 그치지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먹으면
그 술은 우리를 망치게 하는 마구니에 다름 아닙니다.
세상 만사가 모두 이러합니다. 권력도 거기 올라가서
여러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권력은 보살의
지위입니다. 보살행을 할 수 있는 위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권력이 무엇인지 천지 분간 하지 못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서 사리(私利)를 채우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돈을 갈취한다면 권력 또한 마구니의 자리요,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를 접하면, 매일같이 야당은
여당이 나쁜 짓 했다고 주장하고, 여당은 야당이
나쁜 짓 했다고 서로 헐뜯는 이야기뿐입니다.
마치 진흙밭에서 두 마리의 강아지가 싸우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출사할 당시의 국민과의 약속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고
자신을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려 놓은 것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고
자기의 위치와 당리당략 등 작은 이익에 매몰되어
이 나라를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출사의 초심을 잃고
소아적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 모두가
지옥에서 살아야 됨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입니다.
나라의 일꾼이 바르게 서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불행이며,
동시에 우리 민족의 비운(悲運)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고통과 장애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해도 장애가 생기고,
좀 편하게 살 만하면 누가 아프고, 조금 잘살게 될 것 같으면
또 무슨 일이 터지고 하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가 복연을 맺고
공덕을 하나 둘씩 쌓아가고 그 인연으로 해서 고통과
장애를 이겨나가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고통과 장애를 이겨나갈 때 우리도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개인생활을 정려히 하고,
인간의 본성과 근본을 궁구하는 자세와 초심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의 목적인 성불과
불국정토 건설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500여 년 동안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사람들은 헤아려봐야 불과 몇 사람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300년경에 출현했다는
세친보살, 그후에 무착보살, 용수보살, 마명보살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원효 스님, 보조국사 지눌 스님,
이 오대산에서 한암 스님 해봐야 몇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애와 고통을 이기고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노력이
그만큼 부족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동시에 고통과 장애를 극복하며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기가 그만큼 험난하고
어렵다는 반증도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등불이 되고
모두가 이로운 이 길이야말로 우리 불자들이
가야 할 분명하고도 확고한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되는 길의 어렵고 험난함과 그 길을 걸어서
마침내 법계의 등불이 되신 부처님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아를 버리고
세상의 밝은 등불 즉, 부처되고자 하는
환한 원(願)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노력을 그만큼 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고통의 바다에서 나를 건져 주려고
하더라도 내가 노력하지 않고 나의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그것을 이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난다는 말처럼 부처님의 원력과
자비가 사바에 충만하다고 하더라도 중생이 사바세계를
벗어나려고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코자 하는
노력과 정진이 없는 한에는 성불은 요원한 것이며,
이 세상은 영원히 고통의 바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번뇌 가득한 소아적 견지에서는 밝은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소아를 버리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스스로 살피고 채찍질할 때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작은 것 한 가지라도
이 땅에서 실천함으로써 우선 거기에서 내 마음의 안정을
얻고 나아가서는 내 가족에게 마음의 편안함을
줄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웃과 사회와 국가는
물론 이 세계에 평안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편해지고 내 이웃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것에서 시작해서 꾸준히 정진한다면
이 시대 불자들의 총원인 불국정토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부디 장애를 공부하는 밑거름으로 생각하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서
저마다 큰 성취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불기2545년 10월 신중기도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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