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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절
그리운 스승 한암

한암일발록

자서구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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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11-19 10:25 조회6,567회 댓글0건

본문

제5장 자서구도기
 
일생패궐
■ 번역 ■
내가 스물네 살 되던 기해년(己亥年, 1899) 7월 어느 날, 금강산 신계사 보운강희(普雲講會 : 보운강원)에서 우연히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만약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티끌과 같은 한량없는 세월〔劫〕 동안 몸과 팔을 태우며 그리고 모든 경론(經典)을 줄줄 읽고 갖가지 고행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써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한갓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는 대목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온 몸이 떨리면서 마치 죽음을 맞이하는 듯하였다. 게다가 장안사(長安寺) 해은암(海恩庵)이 하룻밤 사이에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더 무상한 것이 마치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 그리하여 모든 계획이 다 헛된 일임을 절감하였다.
(신계사 강원에서) 하안거를 마친 뒤 도반 함해선사(含海禪師)와 함께 짐을 꾸려 행각 길에 올라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 성주 청암사(靑岩寺) 수도암(修道庵)에 도착하였다. (여기엔 경허화상이 계셨는데) 경허화상(鏡虛和尙)께서 “무릇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형상이 상(相)이 아님을 간파한다면 곧 바로 여래(如來)를 볼 수 있을 것이다.”는 (금강경) 법문에 이르러, 문득 안광(眼光)이 확 열리면서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눈 속으로 들어오니, 모든 사물(事物)이 다 ‘나〔我〕’ 아님이 없었다.
(수도암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다음 날) 경허화상과 함께 합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문득 화상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네.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네’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내가 답하였다.
“물은 진(眞)이요, 다리는 망(妄)입니다. 망(妄)은 흘러도 진(眞)은 흐르지 않습니다.”
경허화상께서 말씀하셨다.
“이치로 보면 참으로 그렇지만, 그러나 물은 밤낮으로 흘러도 흐르지 않는 이치가 있고, 다리는 밤낮으로 서있어도 서있지 않는 이치가 있는 것이네.”
내가 다시 여쭈었다.
“일체 만물은 다 시작과 끝, 본(本)과 말(末)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본래 마음은 탁 트여서 시종(始終)과 본말(本末)이 없습니다. 그 이치가 결국은 어떠한 것입니까?”
경허화상께서 답하셨다.
“그것이 바로 원각경계(圓覺境界)이네. 경(經, 원각경)에 이르기를 ‘사유심(思惟心, 분별심)으로 여래의 원각경계를 헤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반딧불로써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끝내는 태울 수 없다’라고 하였네.”
내가 또 여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여래의 원각경계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화두를 들어서 계속 참구해 가면 끝내는 깨달을 수 있게 되네.”
“만약 화두도 망(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두도 망(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것은 곧 화두 참구가 잘못된 것이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즉시 ‘무(無)’자 화두를 참구하게.”
해인사 선원에서 동안거를 보내고 있던 중 하루는 게송을 하나 지었다.
“다리〔脚〕 아래는 푸른 하늘, 머리 위에는 산,
쾌활한 남아(男兒)가 여기에 이른다면
절름발이도 걷고 눈먼 자도 보게 되리
북산(北山)은 말없이 남산(南山)을 마주하고 있네.”
경허화상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는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각하청천(脚下靑天)과 북산무어(北山無語)’ 이 두 구(句)는 맞지만 ‘쾌활남아(快活男兒)와 파자능행(跛者能行)’ 구(句)는 틀렸네.” 하시었다.
(해인사에서) 동안거를 지낸 뒤 화상께서는 통도사와 범어사로 떠나셨지만, 나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우연히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 (해인사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곧바로 만행 길에 올라 통도사 백운암에 이르러 몇 달 있던 중, 하루는 입선을 알리는 죽비소리를 듣고 또다시 개오처가 있었다.
그 뒤 동행하는 스님에게 이끌려 범어사 안양암에서 겨울을 지내고, 다음 해 봄에 다시 백운암으로 돌아와 하안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경허화상께서는 청암사 조실로 계셨는데, 급히 편지를 보내 나를 부르셨다. 나는 행장을 꾸려 가지고 청암사로 가서 화상을 뵈었다.
청암사에서 하안거를 보낸 다음 가을에 다시 해인사 선원으로 왔다. 계묘년(1903) 여름, 사중(寺中 : 해인사)에서 화상을 (조실로) 모시고자 청하였다. 그 때 화상께서는 범어사에 계시다가 해인사 선원으로 오시어 선원 대중 20여 명과 함께 하안거 결제를 하셨다.
하루는 (대중과 함께) 차를 마시던 중 어떤 수좌가 《선요(禪要)》에 있는 구절을 가지고 경허화상에게 여쭈었다.
“(고봉화상의 《禪要》에 보면) ‘어떤 것이 진정으로 참구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깨닫는 소식인고? 답하기를 남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서는 비가 내리도다.’ 이런 말이 있는데, 묻겠습니다만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경허화상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한다면 그것은 마치 자벌레가 한 자를 갈 때 한 바퀴 굴러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시고는, 대중들에게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 하고 물으셨다.
내가 답하였다.
“창문을 활짝 열고 앉으니 담장이 눈앞에 있습니다.”
화상께서 다음 날(하안거 해제일) 법상에 올라 대중들을 돌아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원선화(遠禪和 : 漢岩重遠)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를 넘었도다. 그러나 아직은 무엇이 체(體)고 무엇이 용(用)인지 잘 모르고 있도다.”
이어 동산(洞山)화상의 법어를 인용하여 설하시기를,
“‘늦여름 초가을 사형사제들이 각자 흩어져 떠나되, (곧바로) 일만리(一萬里) 풀 한 포기도 없는 곳(역자 주 : 번뇌망념이 없는 곳)으로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노라. 나라면 ‘늦여름 초가을 사형사제들이 각각 흩어져 떠나되, 길 위의 잡초를 낱낱이 밟고 가야만 비로소 옳다’고 말하리니, 나의 이 말이 동산화상의 말과 같은가 다른가?”.
대중이 아무 말이 없자 화상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 스스로 답하겠다.” 하시고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법상에서 내려오시어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해인사에서) 하안거를 지낸 뒤 화상께서는 범어사로 떠나셨다. 대중들도 모두 흩어졌으나 나는 병에 걸려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전등록》을 보다가 약산화상과 석두화상의 대화 가운데 “한 물건도 작위(作爲)하지 않는다(一物不爲)”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문득 심로(心路 : 망심, 분별심)가 뚝 끊어지는 것이 마치 물통 밑이 확 빠지는 것과 같았다. 그 해(1903~4) 겨울 경허화상께서는 북쪽(갑산)으로 잠적하셨는데, 그 뒤로는 더 이상 뵐 수가 없었다.
갑진년(甲辰年 : 1904)에 다시 통도사로 가서 용돈이 좀 생겨 병을 치료했지만 고치지도 못한 채 인연을 따라 6년 세월을 보냈다. 경술년(庚戌年 : 1910) 봄 묘향산 내원암에서 하안거를 보내고 가을엔 금선대로 가서 겨울과 여름 두 철을 지냈다. 이듬해 가을(1911)엔 맹산 우두암으로 가서 겨울을 지냈다. 다음 해(1912) 봄 어느 날 함께 지내고 있던 도반(사리)이 식량을 구하러 밖으로 나간 사이에, 혼자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홀연히 발오(發悟)하니, 처음 수도암에서 개오(開悟)할 때와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한 줄기 활로가 부딪치는 곳마다 분명했다(역자 주 : 한암의 네 번째 깨달음, 확철대오). 그리하여 ‘아!’ 하고는 다음과 같은 연구(聯句)의 게송을 읊었다.
하지만 말세를 당하여 불법이 매우 쇠미하여 명안종사(明眼宗師)의 인증(印證)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화상께서도 머리를 기르고 유생의 옷을 입고서 갑산 강계 등지를 왔다 갔다 하다가, 이 해(1912)에 입적하셨으니 어찌 여한(餘恨)을 다 말할 수 있으리오?
그래서 이 한 편의 글을 써서 스스로 꾸짖고 스스로 맹서하노니, 한 소식 명백히 하기를 기약하노라.
돌( : 쯧쯧)!
부엌에서 불 붙이다 홀연히 눈이 밝았네.
이로부터 옛 길〔古路〕은 인연따라 청정했네.
만일 누가 나에게 조사서래의를 묻는다면
바위 아래 물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삽살개는 나그네를 보고 어지럽게 짖네.
산새는 사람을 조롱하듯 지저귀네.
만고에 빛나는 마음 달〔心月〕이여.
하루아침에 세상 바람을 모두 쓸어 버렸네.
■ 原文 ■
余二十四歲 己亥七月日에 在金剛山神溪寺普雲講會에서 偶閱普照國師修心訣타가 至若言心外有佛이요 性外有法이라하야 堅執此情하야 欲求佛道者댄 縱經盡劫토록 燒身煉臂(云云)하고 乃至 轉讀一大藏敎하며 修種種苦行이라도 如蒸沙作飯하야 只益自勞處라하야는 不覺身心悚然하야 如大恨(限)當頭라. 又聞長安寺海雲庵이 一夜燒盡하야는 尤覺無常如火하야 一切事業이 皆是夢幻이라.
解夏後에 與同志含海禪師로 束裝登程하야 漸次南行하야 至星州靑岩寺修道庵하야 參聽鏡虛和尙이 說, 凡所有相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라하야는 眼光忽開하여 盖盡三千界하니 拈來物物이 無非自己라. 留一宿하고 隨和尙하야 陜川海印寺路中에 問余曰, 古云호대 人從橋上過에 橋流水不流라하니 是甚큯意志오 余答云호대 水是眞이요 橋是妄이니 妄則流而眞不流也니이다. 鏡虛和尙이 曰, 理固如是也나 然이나 水是日夜流而有不流之理요 橋是日夜立而有不立之理라하시다. 余問호대 一切萬物은 皆有終始本末이로되 而我此本心은 廓然하야 無始終本末이니 其理畢竟如何닛고. 和尙이 答云, 此是圓覺境界라 經云호대 以思惟心으로 測度如來圓覺境界댄 如取螢火로 燒須彌山하야 終不能着이라하시다. 又問, 然則如何得入이닛고. 答호대 擧話頭究之하면 畢竟得入이니라. (又問호대) 若知是話頭亦妄이면 如何오. 答호대 若知話頭亦妄이면 忽地失脚이니 其處卽是仍看無字話하라.
過寒際於海印寺禪社라가 一日作一偈云호대 脚下靑天頭上巒하니 快活男兒到此間이면 跛者能行盲者見이리라 北山無語對南山이로다. 和尙이 見而笑曰, 脚下靑天與北山無語句는 是나 而快活男兒與跛者能行句는 非也라하시다. 過寒際後에 和尙發行하여 向通梵等寺나 余則仍留라가 而偶得病하여 幾死僅生이라. 過夏後에 卽發程하야 到通度寺白雲庵하야 留數朔이라가 一日入禪次에 打竹벤에 又有開悟處하다. 而爲同行所牽하야 往梵魚寺安養庵하야 過冬하다. 翌春에 又到白雲庵하야 過夏次에 和尙住錫於靑岩寺祖堂할새 馳書招余어늘 余卽束裝하야 進謁하여 過一夏하고 秋에 又來海印寺禪院하야 至癸卯夏에 自寺中으로 請邀和尙할새 和尙은 時在梵魚寺라가 來到하여 而禪衆二十餘人과 同結夏矣라.
一日喫茶次에 有僧이 擧禪要云호대 如何是實參實悟底消息이닛고. 答호대 南山起雲北山下雨니라. (有僧이) 問호대 是甚큯意旨오. 和尙이 答호대 譬如尺��一尺之行一轉이라하시고 仍問大衆호대 此是甚큯道理오하시다. 余答호대 開�而坐하니 瓦墻在前이니다. 和尙이 翌日에 陞座하야 顧大衆曰, 遠禪和의 工夫가 過於開心이라. 然雖如是나 尙未知何者爲體하고 何者爲用이니라. 又擧洞山云호대 夏末秋初에 兄弟家가 各自散去하야 向萬里無寸草處去라하나 余則不然하야 夏末秋初에 兄弟家가 各自散去할새 路上雜草를 一一踏着이라야 始得다하리니 與洞山語로 是同가 是別가. 衆皆無對할새 和尙云호대 衆旣無對하니 余自對去하리라하고는 遂下堂하야 歸方丈하시다.
解夏後에 和尙은 過梵魚寺하고 衆皆散去로되 而余病하야 不能適他라. 一日에 看傳燈錄타가 至藥山對石竇云, 一物不爲處라하야는 驀然心路忽絶이 如桶底脫相似라. 而其冬에 和尙이 入北地하야 潛跡하시니 更不拜謁矣라.
甲辰坐通度寺하야 得錢治病이로대 而病亦不愈라 隨緣度了六年光陰하고 而庚戌春에 入妙香山하야 過熱際於內院(庵)하다. 秋에 往金仙臺하야 過熱寒二際하고 而秋來孟山牛頭庵하야 過寒際하고 而翌年春에 同居? 梨가 包粮次出去로대 余獨在廚中着火타가 忽然發悟하니 與修道開悟時와 少無差異라. 而一條活路가 觸處分明이라. 鳴呼라 톺吟聯句하다.
時當末葉하야 佛法衰廢之甚하야 難得明師印證이라. 而和尙은 長髮服儒하야 來往於甲山江界等地라가 是歲入寂하시니 餘恨可旣로다. 故로 書這一絡索葛藤하야 自責自誓하노라 期其一着子明白하노라 . 是何言歟아.
着火廚中眼忽明 從玆古路隨緣淸
若人問我西來意 岩下泉鳴不濕聲
村尨亂吠常疑客 山鳥別鳴似嘲人
萬古光明心上月 一朝掃盡世間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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