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식(惡氣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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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7-04 14:56 조회7,007회 댓글0건본문
악기식
■ 번역 ■
옛 스님이 이르시되, “이 문에 들어와서는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간절히 천착(穿鑿)을 꺼린다.” 하시고, 또 이르시되, “지묵(紙墨)에 오를까 두려워 한다.”하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부처님께서 마갈타국에서 외부와의 문을 막고 수행하신 일(摩竭掩關)1)과 달마대사께서 소림(少林)에서 면벽(面壁)2)하신 일이 오히려 전적(傳迹)이 부끄럽고, 임제(臨濟)선사의 할(喝)3)과 덕산스님의 방망이(棒)4)가 또한 마음을 훔치는 귀신을 면하지 못함이어늘, 장구(章句)를 찾아 따 맞추어 어지러운 언설로 사람을 속이며 대중을 미혹케 함이랴. 영리한 이가 삼각산 생기기 전과 한양성이 형성되기 전과 선학원(禪學院)이 창립되기 전에 알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허물이 적지 않고 크게 우둔함이어늘 하물며 한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관악산 빛에 눈을 붙임이랴.
허허! 말세가 되어서 그러한가. 불법의 시운이 변천해서인가. 소위 본색이 납자인 자가 입을 열어 지식을 과장하며 글 쓰는 것을 일삼아 가지를 당겨오고 넝쿨을 끌어다가 손으로 분(粉)을 발라서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업식종자(業識種子)를 희롱하여 생사의 뿌리와 싹을 일으킴이랴. 조금이라도 선가의 가풍(家風)을 드러낼 것 같으면, 전선선원(全鮮禪院)에 선중(禪衆)이 한 30명·20명·10여 명이 함께 모인 것을 모두 낱낱이 한 30방망이를 주어서, 쫓아 헤쳐버리고 껄껄 웃고 돌아오면 조금쯤 그럴듯 할 것이나, 우선 나부터 이 위에 말한 몇 마디 말이 악기식(惡氣息)으로 가추(家醜)를 드날려 대중에게 자랑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혹 떼려다가 혹 하나 더 붙인 셈이다. 참으로 우습고 우습도다. 피를 토하도록 울어도 소용없으니 입을 다물고 남은 봄을 보내니만 못하리라.
그러나 모든 부처와 조사가 어지러이 말씀하신 것은 비불외곡(臂不外曲)이라. 속담에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지 않는다.’는 말이니 큰 자비의 원력으로 출현하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삼각산이 생겨나고, 한양성이 형성되고, 선학원이 창립되었네. 따라서 작은 책자〔小誌〕까지 창간되었네. 어서 바삐 정진하여 이 위없는 큰 도를 대중에게 권발하소.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生)에 이 몸을 제도하리요.
백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니
부지런히 닦아보세.
동산화상의 자계(自誡)이신 말씀을 보지 못하였는가?
“한낱 허환한 몸이 능히 몇 날이나 사는데, 저 부질없는 일을 위하여 무명(無明)을 기르는고.”하셨으니, 우리 중생들이 조석으로 마음 쓰는 것을 관찰하여 보면 모두가 성현께서 꾸짖으실 일이로다.
탐욕과 성냄과 질투와 아만과 게으름으로, 죄업의 불에 나무 섶을 더하며, 헐뜯고 칭찬하고, 옳고 그르고, 얻음과 잃음, 영광됨과 욕됨으로 항상 쓰는 재보로 삼으니, 어찌 가련하지 않으리오. 부처님과 조사의 성실한 말씀으로 업행(業行)을 조명하고, 법계(法界)를 깨달아 닦으면 범부가 성현되는 것이 한 생각 사이에 자재하게 되리니, 나의 지식이 천단(淺短)하나 대강 말하리라.
탐심이 일어날 때에 탐심이 일어나는 근본을 살펴보면 본래 공적(空寂)하나니, 없는 마음에 자기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일으켜서 무한한 고통을 받는 것이, 마치 누에가 몸 속에서 실을 내어 제 몸을 결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관찰하여 당장에 한 칼로 두 쪽을 내어 다시는 상속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속하면 범부의 망정(妄情)을 그대로 사용함이요, 억누르고 끊어서 나지 않게 하면 이승(二乘)5)에 항복함이요, 당처가 공적하여 끊음 없이 끊어야 대승(大乘)의 깨달은 지혜이니, 깨달은 지혜가 둥글게 밝아서 생각마다 어둡지 않으면 탐욕과 애착이 곧 해탈의 진원(眞源)이요 마왕이 곧 호법의 선신(善神)이 됩니다.
탐애 질투와 아만과 게으름이 또한 이와 같아서 마음마음을 깨달아 파(破)하면 마음마음이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육조대사(六祖大師)가 이르시되, “앞 생각이 미(迷)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을 깨달으면 부처요, 앞 생각이 경계에 집착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부처니라.” 하셨습니다.
그런즉 부처와 중생이 한 생각 사이에 나의 마음 쓰는 대로 성립되니 이것이 곧 살활자재(殺活自在)의 기권(機權)인 방편입니다. 이 기권을 잡아쥐고 나의 수중에서 뜻대로 수용하게 되면 어찌 보리도를 성취하지 못할까 근심하리오.
마음마음을 깨달아서 깨달음이 순일하게 익어지면 자연히 항상 깨어있게 되리니 항상 깨어있기 때문에 대각(大覺)이요, 대각이기 때문에 각사(覺士)라 합니다.
무연(無緣)의 대자비를 잘 운용하여 유연중생을 제도하면 그 누가 대장부·천인사·세존이 아니리요. 그런즉 성불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겉 모양이나 치장에 있지 않습니다.
또 지혜로 깨달아 살피는 데 있고 의식적으로 널리 힘들여 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시되, “고기가 뼈를 바꾸어 용이 됨에 그 비늘을 바꾸지 않고,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되어도 그 얼굴을 고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심은 스스로 뜻을 얻은 후에 스스로 도를 이루는 것이요, 필경 언어 문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뜻을 얻고는 말을 잊는다 하시고, 또 마음을 얻으면 세간에 거친 말이나 자상한 말이 모두 실상법문(實相法門)이요, 말에 떨어지면 염화미소(拈花微笑)6)가 또한 경전에 나열된 문자일 뿐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위에 제시한 말들이 교내법문(敎內法門)인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인가. 마음에 얻음인가, 말에 떨어짐인가. 몸에 혈기 있는 사람은 정신을 바짝 차려 속히 말해 보시오. 머뭇거리는 사이에 십만 팔천 리나 멀어짐이올시다. 그러면 머뭇거리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가?
주장자로 한 번 법상을 치고 이르기를,
밤길 걸을 때 흰 것을 밟지 마소.
물이 아니면 돌이올시다.
■ 原文 ■
古德이 이르사되 “이 門에 들어와서는 知解를 두지 말라.”하시고, 또 이르사되 “간절히 穿鑿을 忌한다.” 하시고, 또 이르사되 “紙墨에 오를까 두려워 한다.”하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댄 摩竭의 掩關과 少林의 面壁이 오히려 傳迹이 부끄럽고, 臨濟의 喝과 德山의 棒이 또한 偸心鬼子를 免하지 못함이어늘, 하물며 章을 尋하며 句를 摘하야 胡言亂說로 人을 欺하며 衆을 惑함이랴. 伶났漢이 三角山 생기기 前과 漢陽城 배판하기 前과 禪學院 創立하기 前에 알아가더래도 오히려 郎當이 不少하고 鈍置가 大殺이어늘, 하물며 漢江水聲에 耳膜을 기울이고 冠岳山色에 眼睛을 부침이랴.
噓噓! 末世되야 그러한가 佛法時運이 變遷함인가. 所謂 本色衲子가 兩片皮를 �하야 知識을 誇張하며 楮毫를 일삼아 牽枝引蔓하며 添脂着粉하야 無始劫來에 業識種子를 戱弄하야 生死根苗를 引起함이랴. 略干 家風을 드러낼 것 같으면 全鮮禪院에 禪衆이 限 三十名·二十名·十餘名 同聚한 것을 모다 箇箇이 한 三十棒을 주워서 쫓아 헤쳐버리고 呵呵大笑하고 돌아오면 조그만치 그럴 듯이나 할 것이어늘, 爲先 나부터 已上 數語가 惡氣息으로 家醜를 드날려 大衆에게 薰하야 마쳤으니 眞所謂 혹을 떼려 하다가 혹 하나 더 부친 세음이다. 참 우습고 우습도다. 啼得血流無用處하니 不如緘口過殘春이다.
그러나 諸佛諸祖가 胡亂指注하신 것은 臂不外曲이라. 常談에 팔이 들이굽지 내굽지 않는다는 말이다. 大慈願力으로 出現하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三角山이 생겨나고 漢陽城이 배판되고 禪學院이 創立됐네. 따라서 小誌까지 創刊됐네. 어서 바삐 進行하소. 이 無上大道를 大衆에게 勸發하소. 此身을 不向今生度하면 更待何生度此身가. 百千萬劫에 만나기 어려운 佛法 만난 김에 부지런히 닦아보세.
洞山和尙의 自誡하신 말씀을 보지 못하였나. “한낱 허환한 몸이 능히 몇날이나 사는데 저 부질없는 일을 爲하야 無明을 기루는고.”하셨으니 我等 衆生의 朝暮 用心을 觀察하여 보면 모두가 聖賢의 꾸짖으신 바 일이로다.
貪瞋嫉妬와 我慢放逸로 業火에 薪을 加하며 毁譽是非와 得失榮辱으로 恒常 쓰는 財寶를 삼으니 어찌 憐悶하지 아니하리요. 佛祖의 誠實語로 業行을 照明하고 法界를 悟修하면 凡夫 고쳐 聖賢됨이 一念間에 自在하니 나의 知識 淺短하나 대강 들어 말해 보세.
貪心이 일어날 때에 貪心나는 根本을 살펴보면 本來空寂 없는 마음을 自作障難 일으켜서 無限한 苦痛을 받는 것이 比컨대 蠶蟲이 제 속에서 실을 내어 제 몸을 結縛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觀察하야 當下에 一刀로 兩斷하야 다시 相續하지 마시요. 相續하면 凡夫의 妄情을 그대로 使用함이요. 抑斷하야 나지 않게 하면 二乘에 捺伏이요 當處가 寂滅하야 斷하는 것 없이 斷하여사 大乘의 覺智오니 覺智가 圓明하야 念念이 不昧하면 貪愛가 곧 解脫의 眞源이요 魔王이 곧 護法의 善神이올시다.
瞋쨌嫉妬와 我慢放逸이 또한 다시 이와 같애서 마음마음이 覺破하면 마음마음이 成佛하네. 이러므로 六祖大師 이르사되 “前 생각이 迷하면 衆生이요 뒤 생각이 깨달으면 佛이요 前 생각이 경계에 着하면 衆生이요 뒤 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佛이라.”하셨습니다.
그런즉 佛과 다못 衆生이 一念間에 나의 마음 쓰는대로 成立되니 이것이 곧 殺活自由의 機權이다. 이 機權을 잡아가져 나의 手中에 如意受用하는 同時에야 어찌 菩提道를 成就하지 못할까 근심하리요.
心心이 覺悟하야 覺悟가 純熟하면 自然 常覺되오리니 常覺故로 大覺이요 大覺故로 覺士올시다. 無緣大慈를 運轉하야 有緣衆生을 濟度하면 그 아니 大丈夫 天人師 世尊이리요. 그런즉 成佛이 마음에 在하고 外相莊嚴에 在하지 않습니다. 또 智慧로 覺察하는데 있고 意識으로 廣求力制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古人이 이르사되 “고기가 骨을 換하야 龍을 成함에 그 鱗을 改하지 아니하고 凡夫가 心을 回하야 佛을 作함에 그 面을 改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佛心은 스사로 得意한 然後에 스사로 成道하는 것이요 畢竟 言語文字에 屬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得意忘言이라 하시고, 또 心에 得하면 世間에 言細語가 다 實相法門이요 口에 失하면 拈花微笑가 또한 敎內陳迹이라 하셨습니다. 그런즉 上來에 提說한 葛藤이 敎內인가 敎外인가 心에 得함인가 口에 失함인가. 皮下에 有血한 이는 急히 精彩를 부치시요. 擬議之間에 十萬八千이올시다. 그러면 不擬議가 還得큯아.
以柱杖으로 打卓一下云, 夜行에 莫踏白하소 不是水면 便是石이 올시다.
1) 마갈엄관(摩竭掩關) : 마갈엄실(摩竭掩室)이라고도 하며 선림(禪林)에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을 표시할 때 쓰는 말임. 마갈은 마갈타(摩竭陀)의 약칭으로 부처님이 성도하신 곳이다. 《지도론(智度論)》 7에 말하기를 “부처님이 득도 후 57일은 말하지 않았다.”하니 뜻은 엄실(掩室)을 말한 것임.
2) 소림면벽(少林面壁) : 중국 육조(六朝)시대에 선종의 개조인 달마(達磨)대사가 양(梁)나라 숭산 소림사에서 9년 간 벽을 마주 대하고 좌선을 했으므로 이를 소림면벽(少林面壁), 또는 면벽 9년(面壁九年)이라 한다.
3) 임제할(臨濟喝) : 임제스님의 ‘억’소리. 임제(?~867)는 중국 스님으로 속성은 형(邢). 법명은 의현(義玄). 임제종의 개조(開祖). 시호는 혜조선사(慧照禪師). 수행자들이 와서 법을 물으면 즐겨 할(喝 : 고함)을 썼으며 저술로는 《임제혜조선사어록》 1권이 있다.
4) 덕산방(德山棒) : 덕산스님의 몽둥이. 덕산(760~865)은 중국 검남(劒南) 사람으로 속성은 주(周), 법명은 선감(禪鑑). 시호는 견성대사(見聖大師)이다. 수행자들이 찾아와서 도(道)를 물으면 몽둥이로 때렸기 때문에 덕산방(德山棒 : 덕산스님의 몽둥이)이라는 말이 생겼다.
5) 이승(二乘) : 성문승, 연각승.
6) 염화미소(拈華微笑) : 석존이 영축산(靈鷲山)에서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참석한 대중 가운데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다만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알고 파안미소(破顔微笑) 했다. 이때 세존(世尊)은 “여래(如來)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 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 해설 ■
이 글은 <선원>2호(1932년 2월호)에 실린 법문이다. 악기식(惡氣息)이란, 지독스런 구린 냄새를 말하는데, 선문(禪門)에 있어 가장 구린내 나는 물건은 다름아닌 지식을 자랑하는 것, 글을 쓰는 것, 자기 자랑, 알음알이(知解), 천착(穿鑿)등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깨달으면 세간의 속된 말들도 모두 실상 법문이 되지만, 언어에 떨어지면 염화미소의 선기(禪機)도 모두 언어문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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