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초조에 대하여(海東初祖에 對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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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7-25 13:29 조회7,040회 댓글0건본문
해동초조에 대하여(海東初祖에 對하여)
■ 번역 ■
법왕(佛陀)과 법왕이 출세하고 출세하심에 마음법을 전수하실 때 반드시 가사와 발우로써 표준을 삼아 두 곳을 기준으로 하여 전수하시니, 첫째는 부처와 부처가 서로 전수함이니 전불(前佛)이 후불(後佛)에게 전수하심이요, 둘째는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수함이니 법왕(佛陀)의 멸도 후에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수하여 도법이 끊어지지 않게 하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들의 본사(本師)이신 석가세존께서 49년간 설법하여 중생을 제도하시고, 진귀조사께 받으신 조사선1)을 교(敎) 밖에 별도로 전하사 마하가섭에게 부촉하시고, 겸하여 의발을 전하사 33조사가 대대로 계승케 하사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수하는 뜻을 표시하시고, 또 의발(衣鉢)을 부촉하사 가섭으로 하여금 계족산에 가지고 들어가 입정하였다가 미륵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실 때 가졌던 의발을 드리게 하사 부처와 부처가 서로 전수하는 뜻을 표시하시고, 또 아난으로 하여금 일대교의(一大敎義)를 듣게 하여 다문(多聞) 제일이 되게 하시고, 필경에는 가섭의 가르침으로 깨닫게 하사 제2조(第二祖)가 되고 가섭을 제1조가 되게 하셨으니, 이는 곧 뒤에 불교를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먼저 교의(敎義)를 통달한 뒤에 다시 조문(祖門)으로 들어가 마음을 밝히고 종지를 통달하여 조사의 연원(淵源)을 이어서 불조의 혜명(慧命)을 영원히 단절하지 않게 하신 명의(命義)시니, 누가 감히 그렇게 하신 까닭에 이의를 두리오.
제3, 제4로 차례로 전수하사 제28대 달마조사에 이르러서 조사의 도가 동토(東土)에 유전(流傳)할 시기를 관찰하시고 진단(震旦 : 중국)으로 오시어 종지를 드날리시되, 먼저 상(相)을 배척하시고 바로 마음을 가리키시니, 이는 교법이 들어온 뒤에 일찍이 없었던 일대 변혁적인 일입니다. 보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전부 물러갔지만 오직 혜가대사가 팔을 끊어 법을 구하시니, 말 속의 낙처를 아시고 필경에 달마조사께서 “소이(所以)를 말하라.”하시는 명령에 삼 배를 드리니,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노라.”라는 인가(印可)를 받으시어 진단(震旦)의 제2조가 되시고, 달마는 초조(初祖)가 되었다.
제6조 혜능대사에 이르러서 경(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오도하시니, 대장부·천인사이신 부처님의 인가를 황매산 5조 홍인대사께 받으시고 또 “불법이 너로부터 크게 번창하리라.”하시는 수기를 받으시니, 이로부터 조사 문하에 들어와 마음법을 배우는 자가 벼·삼·대·갈대 포기와 같이 많았다.
깨닫고 나서 법을 전해 받은 이를 전부 기록하기 어려운데 그 가운데서도 남악회양과 청원행사가 제일 큰 수제자들이요, 그 밖에 혜충2)·영가3)·하택 등 모든 대사들도 모두 광대하게 정종(正宗)을 통달한 선지식(善知識)이라. 이로부터 의발을 전하지 않으심은 모두가 제각기 한 곳의 종주(宗主)가 되어 조도(祖道)를 드날림에 대하여 누구에게 특별히 전할 수 없기 때문이요, 또한 투쟁의 발단이 되어 정법에 도리어 방해가 될까 예측하신 것이다.
회양의 문하에 마조도일선사가 나오시니, 이는 곧 서천의 제27조 반야다라존자께서 달마가 동쪽으로 올 것에 대하여 “한 망아지가 나와서 천하 사람들을 밟아 죽이리라.”는 예언의 기록에 부합한 일대 위걸의 인격이라. 그 밑에 84인의 선지식이 동시에 배출되었으니, 서당·백장·남전4)·마곡· 귀종·장경·염관 등 여러 대선사가 이분들이시다. 이로부터 법화(法化)가 크게 번창하여 보고 듣는 자가 모두 보고 느껴서 흥이 일어나는 마음을 발하였으니, 위없는 큰 법이 해외의 모든 나라에 유포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인연이 도래하였다 할 것이다.
그때에 신라 도의대사5)가 선풍(禪風)을 우러러 보고서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 서당지장화상을 배알하시고 법인(法印)을 얻어 동토(東土)로 돌아오신 것이 전기(傳記)에 분명하니, 그러면 달마가 중국의 초조가 되신 것같이 도의(道義)가 해동의 초조가 됨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홍 척6)·혜철7)은 함께 서당에게, 범일8)은 염관에게, 무렴은 마곡에게, 철감9)은 남전에게, 현욱10)은 장경에게 법을 얻은 선후는 차이가 없지 않으나 모두가 동일하게 마조 휘하의 선지식에게 심인(心印)을 얻어 왔으니, 모두 다 육조의 5세 손이다.
도의대사가 육조를 경앙하여 조계종이라 칭할 때에 홍척·혜철 등 모든 대사들도 따라서 한마음으로 경앙한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닌가. 또한 《불교》 58호(편집자 주 : 원문에는 ‘月報 58호’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매월 발행되는 《불교》지를 가리킴)에 퇴경화상의 조계종에 대한 변론을 살핀 즉 <선문조사예참문> 중에 ‘가지산 조사 해외전등 도의국사(迦智山祖師海外傳燈道義國師)’라 칭한 것과, 〈가영〉 중에 ‘조계문선시수개(曹溪門扇是誰開 : 조계의 문호를 그 누가 열었는가.)’라는 구절과 《삼국유사》에 ‘조계종가지산하(曹溪宗迦智山下)’라 칭한 글 등이 유력하게 증명되었으니, 조계종은 도의국사로부터 창립된 것임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서당이 곧 이 육조의 4세 손인즉 그 문하에 법을 얻은 자가 그 위대하신 조사의 성덕(聖德)을 어찌 사모하고 경애하지 아니하였으리오. 사모하고 경애하는 절절한 마음에서 조계종이라는 명칭이 자연히 나왔을 것이다.
아 슬프다. 세월이 아득히 흘러갔고 전해지는 역사가 혼미하여 중간의 연원(淵源)은 누가 누구에게 계승하였는지 상세히 가릴 수 없으나, 보조국사께서 범일(梵日)의 후예로서 대법당(大法幢)을 송광사에 세우시고, 최상종승(最上宗乘)을 열어 펴시어 당세를 이익되게 하시고, 또한 《수심결(修心訣)》·《진심직설(眞心直說)》·《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등 직절경요(直截徑要)의 법문을 저술하여 후학을 널리 깨닫게 하시니, 이에 조사(祖師)의 도(道)를 크게 일으키고 불일(佛日)을 거듭 빛나게 하셨다.
조정의 칙지를 받들어 산 이름을 조계(曹溪)로 고치셨으니, 이는 곧 멀리로는 육조를 경모하고 다시 해동의 모든 국사께서 조계종을 창립한 연원을 계승함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왜 이름을 조계로 바꾸어서 번거롭게 하였겠는가.
또한 국사의 출가한 사실을 〈동비명(同碑銘)〉에, “나이 겨우 8세에 조계운손 종휘선사(曹溪雲孫宗暉禪師)에게 귀의하여 삭발하고 구족계를 받았다.”라고 하였으니, 종휘가 이미 조계운손이라 하였은즉 계승연원이 단절되지 아니한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뒷날 진각11)·자명 등 16국사가 계속 계승되었기 때문에 도통연원(道統淵源)의 광명 정대함이 서천 28조와 당토5종(唐土五宗)에 비교된다 할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국사 가운데 모두 다 보조의 직손인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마는, 이 사람은 조문(祖門)의 도통연원이 국가의 왕위계통과 같음을 모르기 때문이라 하겠다. 무슨 파의 원손(遠孫)을 막론하고 왕위에만 오르면 곧 계통이 되나니, 마음 밝혀 종지를 통달하고 국사 지위를 계승하여 제 몇세, 제 몇세 손이라고 당당하게 칭함에 어찌 직손이 아니라고 이의를 두겠는가. 이와 같은 분명한 대로(大路)를 버리고 왜곡된 길에서 도통연원을 찾는 역설은 덮어 두고 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래 학문상에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12)를 해동 초조로 정하는 일이 간혹 나타나니, 이는 스스로 위배됨이 극심하다 하겠다. 태고(太古)가 중흥조(中興祖)라 함은 혹 가할지는 모르나 어떻게 초조가 되겠는가. 태고의 도덕(道德)이 광대하고 고명하나 초조라는 ‘초(初)’에는 적당하지가 않다.
신라의 모든 국사들이 처음 조문에 들어가서 법을 얻어 동(東)으로 돌아오신 것이, 오늘날 태고가 초조라는 주장 때문에 허황하게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하겠는가. 또한 연원계통을 정직하게 가릴 것 같으면 오늘날 우리 형제가 태고연원이 아님을 단언하는 바이다. 왜 그러냐 하면 구곡각운선사(龜谷覺雲禪師)13)가 조계종 제13국사 각엄존자(覺儼尊者)의 손제자가 됨은 분명히 이능화 선생이 저술한 《조선불교통사》에 기재되어 있는데, 태고국사의 손제자라는 문구는 고래로부터 전해오는 기록이나 또는 비명(碑銘)에도 도무지 없다고 하였은 즉, 무엇을 근거로 하여 태고를 구곡의 스승으로 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당당한 해동 조계종 제13국사의 손제자인 구곡이 다시 임제종의 후손인 석옥에게 법을 얻어 온 태고의 손제자가 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면 뒷 사람이 태고 문하에 구곡을 계승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근거가 적은 사량으로 생각해 보자. 고려가 이미 망하고 이조가 처음 세워짐에 고려 때 사람을 숭앙한다면 어떤 일을 막론하고 필연적으로 저해했을 것이다.
또 승려에게 압박을 내리는 시대이므로, 각 종(宗)을 선교 양종으로 합종시킨 법령 하에서 다시 조계종이라 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또 이렇게 말하리라. 허응·청허·송운 등 모든 선사는 조선조(朝鮮朝) 사람으로서 ‘판조계종종사(判曹溪宗宗事)’가 되었다 하겠지만 그것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오랫 동안 압박을 가하던 끝에 조계종 석 자를 첨가한 것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문에서는 은근히 옛날의 조계종을 추모했던 의사(意思)가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판선종교종사(判禪宗敎宗事)라 아니하고 조계종 종사를 판(判)한다는 뜻을 표시하였겠는가.
또한 조선조(朝鮮朝)에서는 더욱이 중국을 숭배했기 때문에 승려가 중국 연원을 계승한다면, 마치 유교인(儒敎人)이 정자(程子)·주자(朱子)를 사모하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혹 그럴싸하게 여겨 승려로 행세함에 활동하기가 쉬워서 그러한 것 같다.
또한 고려 말에 태고·환암14)·구곡이 차례로 조계종 대선사로 봉해진 것은 임제종 연원에서 사법(嗣法)한 태고·환암을 조계종에서 계승시키더라도 그다지 망발되지 않은 줄로 생각한 것이다. 또한 태고국사의 비명에 이태조(李太祖)께서 제자의 서열(列)에 올랐으니, 잠깐 이러한 권위를 의뢰한 것도 같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추구해 보건대, 뒷 사람이 시세를 따라서 종맥(宗脈)을 변경함과 동시에 해동의 혁혁한 조계종이 없어지고 말았다. 또한 벽계정심선사가 임제 후손 총통화상(總統和尙)에게 법을 얻어 왔음에도 다시 구곡을 멀리 계승〔遠嗣〕함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구곡이 심인(心印)을 전하지 못하고 천화(遷化 : 열반)하심으로 해동 조계종의 연원이 단절됨을 애석히 여겨 구곡이 제13국사 각엄존자의 손제자였던 까닭에 그를 멀리 계승하여 조계연원을 부활하게 하심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벽계가 태고와 더불어 동시에 임제 후손을 계승한 자로서 다시 태고의 증손자가 될 필요가 무엇인가.
이러한 정황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형제들은 해동 조계종 보조국사로부터 제13국사 각엄존자의 손제자인 구곡선사와 구곡을 멀리 계승하여 조계종을 부활하게 하신 벽계선사의 연원이요, 태고의 연원이 아님을 단언할 수 있다.
그런즉 지금으로부터 도의국사를 초조로 정하고, 그 다음에 범일국사, 그 다음에 보조국사로, 제13국사 각엄존자에 이르러서 졸암온연·구곡각운·벽계정심 등으로 연원을 정하여 다시 해동 조계종을 부활하는 것이 정당하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옛 사람이 이미 오랫동안 시행한 것을 갑자기 개정하기 어렵다 하여 태고국사를 계승한다 하더라도, 초조는 반드시 도의국사로 정하고, 그 다음 동시에 법을 얻어 오신 홍척·혜철·범일 등 여러 국사로, 그 다음에는 보조국사로, 내지 16국사로 위수(爲首)하고, 그 다음에 조계종 대선사를 봉한 차서(次序)로 태고보우 국사를 계속하여, 태고·환암·구곡·벽계·벽송, 이렇게 계통을 정하여 해동 조계종의 연원을 정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타당하다. 첫째는 도의국사께서 조계종을 수창(首創)하신 공덕을 찬양하고, 둘째는 보조국사의 상승법(上乘法)을 개연(開演)하여 조도(祖道)를 빛내 뒷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신 은의(恩義)를 경모(敬慕)하고, 셋째는 해동 조계종을 계승 유통하게 하신 제대종사(諸大宗師)의 성덕(盛德)을 포양(褒揚)하고, 넷째는 벽계선사가 구곡을 원사(遠嗣)하여 조계종을 부활하게 하신 본의(本意)를 발현하여 억백 세에 무궁토록 정법이 유통하기를 바라고 바라는 바이다.
■ 原文 ■
第三 第四로 次第傳授하사, 第二十八代 達磨祖師에 至하여, 祖道가 東土에 流傳할 時機를 觀察하시고, 震旦으로 오시사 宗旨를 擧揚하시되, 먼저 相을 斥하시고 바로 心을 指하시니, 敎法流入한 後에 未曾有의 一大變革問題이라. 見者聞者가 다 驚怖하야 退하는 者 全部였지만 오직 慧可大師가 斷臂求法하사 言下에 知歸하시고 畢竟 祖師께서 所以를 言하라 하시는 命令下에 三拜依位하사, 得髓의 印可하심을 받으사 震旦에 第二祖가 되시고 達摩는 初祖가 되신지라 第六祖 慧能大師에 至하야 聞經悟道하사 大丈夫 天人師 佛의 印可를 黃梅山 五祖 弘忍大師께 받으시고, 또 佛法이 由汝大行이라 하시는 記를 주시니, 自此로 祖門에 들어와 心法을 學하는 者 稻麻竹葦와 如한지라.
傳法悟道者를 不可勝記로대 而其中에 南岳讓과 靑原思가 最高한 嫡子이오 其餘 慧忠, 永嘉, 荷澤 等 諸大師도 다 廣大하게 正宗을 通達한 知識이라. 이로부터 衣鉢을 不傳하심은 다 各其 一方宗主가 되야 祖道를 光揚함에 對하야 뉘게다 特別히 傳할 수 없는 사실이오 또 爭端이 되야 正法에 도리어 妨害가 있을까 預測하심이라.
讓의 下에 馬祖道一禪師가 出하시니 이는 곧 西天 第二十七祖 般若多羅尊者께서 達摩의 東來함에 對하야 一馬駒가 出하야 天下人을 踏殺하리라는 預記에 符合한 一大偉傑의 人格이라 其下에 八十四人의 善知識이 同時 輩出하였으니 西堂, 百丈, 南泉, 麻谷, 歸宗, 章敬, 鹽官 등 諸大禪師가 是也라. 自爾로 法化大暢하야 見者聞者가 다 觀感興起하는 心을 發하나니 無上大法이 海外諸國에 流布하지 아니할 수 없는 時節因緣이 到來하였다.
其時에 新羅 道義大師가 望風西泛하사 西堂智藏和尙을 首謁하시고 法印을 得하야 東歸하심이 傳記가 昭昭하니, 그러면 達摩가 震旦에 初祖됨과 如히 道義가 海東에 初祖됨은 智者를 不待하고 可히 判定할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洪陟, 慧徹은 同 西堂에게, 梵日은 鹽官에게, 無染은 麻谷에게, 哲鑑은 南泉에게 玄昱은 章敬에게 得法한 先後는 差異가 不無하나 다 同一히 馬祖下 知識에게 心印을 得하여 왔은즉 同是 六祖의 五世孫이라.
道義大師가 六祖를 景仰하야 曹溪宗이라 稱할 時에 洪陟, 慧徹 등 諸大師도 따라서 同心景仰할 것은 定한 理致가 아닌가. 또 月報 第五十八號에 退耕和尙의 曹溪宗에 對한 辯論을 看讀한 즉 祖師禮懺文中에 ‘迦智山祖師海外傳燈道義國師’라 稱한거와, 歌詠中에 ‘曹溪門扇是誰開’句와 《三國遺事》에 ‘曹溪宗迦智山下’라 稱한 等 文이 有力하게 證明하야 曹溪宗을 道義國師로부터 創立한 것이 조금도 疑問될 것이 없다.
西堂이 卽是 六祖의 四世孫인즉 其門下에 得法한 者가 그 偉大하신 祖師의 聖德을 어찌 慕悅敬愛치 아니하였으리오. 慕悅敬愛하는 本心片片中에서 曹溪宗이라는 名稱이 自然히 湧出하였다.
嗚呼라 星曆이 蒼茫하고 傳史가 塵昏하야 中間淵源은 誰某誰某가 繼嗣하였는지 詳細히 辯明할 수 없으나, 普照國師가 梵日의 後裔로서 大法幢을 松廣寺에 建立하사 最上宗乘을 開演하사 當世를 利益케 하시고, 또 修心訣, 眞心直說, 看話決疑, 圓頓成佛論 等 直截徑要의 法門을 著述하사 將來를 普覺케 하시니, 於是乎에 祖道大興하고 佛日重輝한지라. 朝旨를 奉하여 山名을 曹溪로 變改하셨으니 이는 곧 멀리 六祖를 敬慕하고 다시 海東 諸國師의 曹溪宗 創立한 淵源을 繼承함이 아닌가. 不然하면 何必更名曹溪하야 煩弊케 하였으리오.
또 國師의 出家한 事實은 同碑銘에 “年甫八歲에 投曹溪雲孫宗暉禪師 祝髮受具戒”라 하였으니, 宗暉가 卽是曹溪雲孫이라 하였은즉 淵源이 斷絶하지 아니한 것도 可히 追想할지라. 自後로 眞覺, 慈明 等 十六國師가 繼出하야 道統淵源의 光明正大함이 西天四七과 唐土五宗에 比할지라. 或 말하기를 國師中에 모두 普照의 直孫이 아니라고 하겠지마는 此人은 祖門의 道統淵源이 國家의 王位繼統과 如함을 不知함이라. 某派遠孫을 勿論하고 王位에만 오르면 곧 繼統이 되나니 明心通宗하야 國師位를 繼封하야 第幾世第幾世라고 赫赫하게 稱함에 對하야 어찌 直孫아님을 議論하리오. 如此한 坦坦大路를 버리고 傍蹊曲徑으로 찾아가는 言說은 置之莫論할 것이로다.
그런데 近來 文學上에 太古普愚國師로 海東初祖를 定함이 班班이 現露되니 이는 自違함이 너무 甚한 듯하다. 太古가 中興祖라 함은 或 그럴는지 모르나 어떻게 初祖가 되리요. 太古의 道德이 비록 廣大高明하나 初祖라는 初字에는 대단히 不適當하지 아니한가.
新羅諸國師의 首入祖門하야 得法東歸하신 것이 今日 太古가 初祖라는 問題下에 歸於虛地가 되었으니 어찌 可惜지 아니하리오. 또 淵源繼統을 正直하게 辯明할 것 같으면 今日 我等 兄弟가 太古淵源이 아니라고 斷言하고 싶다. 왜 그러냐하면 龜谷覺雲禪師가 曹溪宗 第十三國師 覺儼尊子의 孫弟子됨은 分明히 李能和先生 所著 《佛敎通史》에 記載되었는데, 太古國師의 孫弟子라는 文句는 古來傳記與碑銘에 都無하다 하였은즉, 何를 據하야 太古로써 龜谷의 法祖를 定할까 생각해 볼 것이다.
堂堂한 海東 曹溪宗 第十三國師의 孫弟子로서 다시 臨濟宗後孫石屋에게 得法하여온 太古의 孫弟子가 될 必要가 無하다. 그러면 後人이 太古下에 龜谷을 繼續한 理由가 무엇인가. 이에 對하여 좀 憑據가 無한 比量을 하여보자. 高麗已墟하고 李朝初創에 高麗時人을 崇仰한다면 某事를 勿論하고 必然的으로 沮毁할 것이오.
또 僧侶에게 壓迫을 내리는 時代라 各宗을 禪敎兩宗으로 合宗시킨 法令下에 다시 曹溪宗이라 稱할 수 없는 事實이다. 或 이렇게 말하리라. 虛應, 淸虛, 松雲 等 諸禪師는 李朝時人이로되 ‘判曹溪宗宗事’가 되었다 하겠지마는 그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오랜 동안 壓迫을 내리든 끝에 曹溪宗 三字를 添入한들 무슨 그다지 興味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宗門中에서는 慇懃히 舊日 曹溪宗을 追慕한 意思가 보인다. 그렇지 아니하면 判禪宗敎宗事라 아니하고 曹溪宗宗事를 判한다는 言義를 表示하였으리오.
또 李朝에서 더욱이 支那를 崇拜한지라 僧侶가 支那淵源을 繼嗣한다면 마치 儒者가 程朱를 思慕하는 것과 如히 國人이 或以爲然하야 僧侶行世에 좀 活動할 希望이 有하야 그러한 것 같다.
또 高麗末에 太古, 幻庵, 龜谷이 次第로 曹溪宗大禪師를 封하게 되였은즉 臨濟宗淵源으로부터 太古, 幻庵을 嗣法하더라도 그다지 妄發되지는 않을줄로 생각한 것이다. 또 太古國師碑銘에 李太祖께서 弟子의 列에 올랐으니 잠깐 威權을 依賴한 것도 같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推究해 보건대 後人이 時勢를 따라서 宗脈을 變更하는 同時에 海東의 赫赫한 曹溪宗이 없어지고 말았다. 또 碧溪正心禪師가 臨濟後孫 總統和尙께 得法而來하야 다시 龜谷을 遠嗣함은 반드시 理由가 有하다. 龜谷이 心印을 傳치 못하시고 遷化하였은즉 海東曹溪宗의 淵源이 斷絶됨을 慨惜히 여겨 龜谷이 第十三國師 覺儼尊者의 孫弟子인 故로 그를 遠嗣하야 曹溪淵源을 復活케 하심은 事實이다. 不然이면 碧溪가 太古로 더불어 同是 臨濟後孫의 嗣法으로 다시 太古의 曾孫弟子될 必要가 무엇인가. 이리 생각해 보고 저리 생각해 보더라도 我等 兄弟의 海東 曹溪宗 普照國師로부터 第十三國師 覺儼尊者의 孫弟子인 龜谷禪師와 龜谷을 遠嗣하야 曹溪宗을 復活케 하신 碧溪禪師의 淵源이요, 太古의 淵源은 아니라고 아니하지 못할 줄로 斷言한다.
그런즉 自今爲始하야 道義國師로 初祖를 定하고 次에 梵日國師로, 次에 普照國師로 第十三國師 覺儼尊者에 至하야 拙庵카衍, 龜谷覺雲, 碧溪正心, 이렇게 淵源을 定하야 다시 海東曹溪宗을 復活하는 것이 正當합니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야 古人이 이미 오랜동안 施行한 것을 猝然히 改正하기 難하다 하야 太古國師를 繼嗣하더라도 初祖는 반드시 道義國師로 定하고, 次에 同時得法而來하신 洪陟, 慧徹, 梵日 等 諸國師로, 次에 普照國師로 乃至 十六國師로 爲首하고, 次에 曹溪宗大禪師를 封한 次序로 太古普愚國師를 繼續하야 太古, 幻庵, 龜谷, 碧溪, 碧松, 이렇게 繼統을 定하야 海東曹溪宗淵源을 正當하게 드러내어서, 첫째는 道義國師의 曹溪宗 首創하신 功德을 讚仰하고, 둘째는 普照國師의 上乘을 開演하야 祖道를 光輝하고 後來에 利益을 주신 恩義를 敬慕하고, 셋째는 海東曹溪宗이 繼承流通케 하신 諸大宗師의 盛德을 褒揚하고, 넷째는 碧溪禪師가 龜谷을 遠嗣하야 曹溪宗을 復活케 하신 本意를 發現하야 億百世 無窮토록 正法이 流通하기를 바라고 바라는 바이다.
1) 조사선(祖師禪) : 문자의해(文字義解)에 걸리지 않고 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선법(禪法). 달마가 본래 전한 선법을 말하며 교외별전(敎外別傳)하는 지극한 선(禪).
2) 혜충(慧忠, ?~775) : 중국 당나라 스님. 호는 남양(南陽). 시호는 대증국사(大證國師), 속성은 염(苒), 월주(越州) 제계 사람. 육조혜능(六祖慧能)에게 인가를 받고 그 법을 이음.
3) 영가(永嘉, 665~713) : 중국 당나라 스님. 법명은 현각(玄覺), 자는 명도(明道), 호는 진각(眞覺), 시호는 무상(無相)대사이다. 《유마경》을 읽다가 견성, 조계산(曹溪山)에서 육조를 뵙고 깨달아 하룻밤을 자고 떠나니 사람들이 일숙각(一宿覺)이라 불렀다. 저술로는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관심십문(觀心十門)》, 《증도가(證道歌)》 등이 있다.
4) 남전(南泉, 748~834) : 법명은 보원(普願).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제자. 중국 당나라 스님. 마조의 문에 들어가 교학(敎學)을 버리고 도를 깨달아 ‘남전참묘(南泉斬猫)’와 같은 통쾌한 공안(公案)을 남겼다. 뛰어난 제자로는 조주(趙州)가 있다.
5) 도의(道義) : 신라 스님. 호는 명적(明寂), 속성은 왕(王), 북한군(北漢郡) 사람. 중국 강서(江西)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서당지장선사(西堂智藏禪師)에게 의심을 결단하고 법을 받다. 이름을 도의(道義)라 고침. 백장산 회해(懷海)에게 법요(法要)를 받다. 귀국 후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가지산선문(迦智山禪門)을 개창, 가지산 선파(禪派)의 제1세 조사.
6) 홍척(洪陟) : 신라 스님. 남한조사(南漢祖師)라고도 한다. 현덕왕 때 당나라에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전해 받고, 서당의 선풍을 드날렸다.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의 하나인 실상산파(實相山派)라는 선문을 개창하였다. 당나라에 가서 법을 전해온 것은 도의(道義)보다 나중이나 절을 짓고 문파(門派)를 이룬 것은 9산문(山門) 중 맨 처음.
7) 혜철(惠哲, 785~861) : 신라 스님. 자는 체공(體空). 속성은 박(朴)씨, 시호는 인적(忍寂), 15세에 출가. 814년 당나라에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심인(心印)을 받음. 탑호는 조륜청정(照輪淸淨), 동리산파(桐裏山派)의 개조(開祖).
8) 범일(梵日, 810~889) : 신라 스님. 품일(品日)이라고도 함. 속성은 김(金). 시효는 통효(通曉). 계림(경주)의 관족(冠族). 선종 9산문 가운데 사굴산( 챍山)의 개조.
9) 철감(澈鑒, 798~868) : 신라 스님. 호는 쌍봉(雙峰). 법명은 도윤(道允). 한주(漢州) 사람. 825년 당나라에 가서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법을 받다. 시호는 철감선사.
10) 현욱(玄昱, 787~868) : 신라 스님. 속성은 김(金). 23세 출가. 824년 당나라에 가서 마조(馬祖)의 제자인 장경회휘(章敬懷暉)로부터 법을 받고, 지리산 실상사 등지에서 선법을 폄. 민애왕·신문왕·문성왕·헌안왕의 존경을 받았으며, 뒤에 선문구산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개조(開祖)가 되다.
11) 진각(眞覺, 1178~1234) : 고려 때 스님. 호는 무의자(無衣子). 법명은 혜심(慧諶), 시호는 진각국사, 자는 영을(永乙). 속성은 최씨. 나주 화순현 사람. 보조국사의 법을 잇고, 수선사(修禪社) 제2세 법주가 되다. 저서로는 《선문염송(禪門拈頌)》, 《진각어록(眞覺語錄)》이 있음.
12) 보우(普愚, 1301~1382) : 고려 말기 스님. 호는 태고(太古). 일명 보허(普虛). 속성은 홍(洪). 흥주 사람. 시호는 원증국사(圓證國師).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 13세 출가. 26세 화엄선(華嚴選)에 합격. 1346년 중국에 가서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잇고 우리나라 임제종의 초조가 되다. 신돈이 죽은 후 국사가 되다.
13) 구곡각운(龜谷覺雲) : 고려 말기 스님. 호는 구곡(龜谷). 남원 사람. 속성은 유(柳)씨. 학행이 높고 글씨도 잘 썼으며,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숭신진승 근수지도 도대선사’의 법호를 받다. 그런데 조계종 법통설에 있어서 구곡각운을 보조국사 지눌 계통으로 본 경우도 있고, 태고국사 보우의 계통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한암스님께선 보조국사 지눌의 계통으로 보았다.
14) 환암(幻庵) : 고려 말기 스님. 법명은 혼수(混修).
■ 해 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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