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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일발록

불영사 사적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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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2-17 17:01 조회5,259회 댓글0건

본문

 

■ 번역 ■

내가 오랫동안 오대산 상원사에서 살아왔는데, 거의 병들고 또 게으른 생활이었다. 계유년 봄, 불영사 주지 박기종 스님이 찾아와서 말하였다.

“불영사는 신라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 그 이름과 역사는 실로 대단하고 유구합니다. 이조 때까지는 흥성과 퇴락의 근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 이전 고려 때 연혁을 기록한 역사는 모두 빠졌습니다. 이제 만약 지금의 일을 기록하여 놓지 않는다면 뒷날에 요즈음의 일을 잊어버림이 역시 지금 고려 때의 일을 잊어버림과 같습니다. 지금 설운장로가 이 절에서 지은 큰 공덕은 더욱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비(碑)를 세워 사적(事蹟)을 기록하고자 하오니 아낌없이 서술해 놓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하되, “이미 비를 세워 사실을 기록하는데 중간의 일이 빠진다면, 훗날 보는 이들로 하여금 완전하지 못하다는 탄식을 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니, 주지가 말하되, “만약 중간의 역사를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는다면 또한 지금의 일도 다 빠지게 됩니다. 전부를 빠뜨리는 것보다는 오늘의 일이라도 기록하여 뒷 사람들에게 밝혀 보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하기를, “잘한다.” 하고는 삼가 옛 기록에 의해서 서술하노라.

옛 기록을 살펴보니, 신라 진덕왕 5년 의상조사가 동경(東京 : 당시 경주의 이름) 바닷가로부터 단하동으로 들어가 해운봉에 올라서서 북쪽을 바라보며 감탄하기를, “서역 천축산을 여기 바닷가에 옮겨 놓은 것과 같구나.”

또 시냇물 위를 보니 다섯 부처님의 그림자가 생기는지라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시냇물 흐르는 대로 찾아 내려가다가 금탑봉에 오르니 밑에는 독룡이 있어 의상조사가 용을 위하여 설법하고 이르기를, “이 땅에 절을 지으려 한다.” 하니, 용이 순순히 조사의 말을 따르지 않기에 신통력의 주문을 외우니 용이 성을 내며 산을 뚫고 돌을 부수고 도망갔다. 의상조사가 곧 웅덩이를 메우고 동방을 향하여 절을 세우는데, 청련전 3칸을 짓고 무영탑을 세워 보강하고 사액(寺額)을 천축산 불영사라 하였다.

이태조 5년, 화재를 만나 절이 불탔는데, 6년에 소운법사가 재건하였다. 성종 5년, 백극제가 울진 현령에 제수되어 수레에서 내린 지 3일 만에 열병을 얻어 쓰러지자, 부인 이씨가 관리에게 “이 부근에 기도할 만한 좋은 절이 있느냐?” “불영사라는 절이 있는데 법당도 오래 되었고 불상도 영험스럽습니다.” 하자, 부인이 수레에 관을 싣고 절의 탑 앞에 나아가 향을 사르고 울면서 축원하기를, “죽은 지아비가 죽을 명이 되어서 죽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비명 횡사로 죽었다면 각천(覺天)에게 구해 주실 것을 엎드려 비옵나이다.” 하고, 무릎 꿇고 기원한 지 3일째 되던 날 밤에 귀신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달아나며, “지금 각천의 은혜로 10년의 원한이 풀어졌다.” 하므로, 부인이 놀라서 정신을 가다듬고 관을 열어보니 엄연히 살아났는지라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탑료를 환희료라 하고, 불전을 환생전이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화경》 7권을 금자(金字)로 사경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선조 11년, 성원법사가 영산전과 서전을 건립하고 남암을 창건하고 동전을 지었다. 두 마리의 학이 절 서편 부용성 밑에 둥지를 틀었는데 임진년 초하룻날, 남정 송추 위에서 탄식하는 듯이 슬픈 소리로 길게 울며 나래를 자주 펄럭이더니 하늘로 올라가고 우물물이 뒤집혀 붉어져서 사흘 동안 먹을 수 없었는데, 이 해에 왜구들이 난을 일으켜 절이 모두 불타 버리고 오직 영산전만 홀로 보존되었다. 성원이 다시 법당과 동서 선당을 중창했다고 한다.

숙종 6년, 태성법사가 선당을 개축하고 이듬 해에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태성법사는 본향인이며 속성은 남씨로 성품이 강직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12세 때 응철장로로부터 계를 받고 호구당에게 참례하여 무애법(無碍法)을 깨달았고, 평소에 베풀기를 즐거워하였으며 계율을 엄정히 지켰다. 임종시에 가부좌를 한 채로 고요히 입적하였다. 다비(茶毘)하는 날, 서기가 허공을 뻗치고 금빛 사리 3과를 얻어 부도를 절 동쪽에 세우고 봉안하였다.  

숙종대왕이 어떤 궁희를 총애하였더니 그 궁희가 왕비를 모함하여 폐출시키자 왕비가 자결하려는데, 꿈에 어떤 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불영사에서 왔는데 내일 좋은 상서가 있을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이튿날 궁희가 모함한 것이 드러나서 죄를 받고 왕비는 환궁을 하게 된지라, 그 뒤 불영사에 사방 십리의 산을 하사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숙종 46년에 화재가 나고 영조 원년에 천옥법사가 중창하였다.

아! 이조 때에는 소운·성원·태성·천옥 등 모든 법사들이 서로 계승하여 불사를 일으켜 허물어지면 이루어 놓은 그 사적이 밝혀져 있는데, 신라로부터 고려 말까지 700여 년 간 중창 수선한 사실이 망연하여 근거가 없도다.

대개 예전에 전해온 역사는 있었으나 혹은 화재를 당하여 불타버렸는지, 아니면 병화(兵火)를 만났는지, 도적들이 약탈하여 갔는지 전력이 캄캄하여 상고(詳考)할 길이 없으니, 무릇 사업을 성취한 공덕을 불가불 상세히 기록하여 뒷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노라.

이제 이야기할 설운장로가 평생 동안 이 절에 공덕을 쌓은 일은 뒷날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다.

장로의 이름은 봉인(奉忍)이요, 속성은 이씨이니, 본은 잠남(岑南)으로 의령 사람이다. 14세 때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몽성화상께 머리를 깎고 계를 받으니, 성품이 강직하고 행동이 근검하여 이사(理事)에 정밀하지 않음이 없고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뿐이니 사람들이 모두 보살이 태어났다고 칭송하였다.

광무 3년. 기해년 봄에 이 절에 와서 조사의 종적을 살피니, 산수가 절승이요 기지가 웅장하고 깊은지라 참으로 도인이 거처할 땅이더라. 한심스러운 것은 용상(龍象) 대덕들이 가고 나니 들여우들이 굴택을 삼음이라. 유래되어 온 토지는 헛되이 잡비로 남용되어 없어지고 옛날에 세운 법당과 요사채는 쓰러져 가는 듯 비바람에 낡았고 뜰앞에는 잡초만 무성하여 수호하는 이마저 없으니, 뜻이 있는 이가 이것을 보고 어찌 한심스럽고 뼈골이 아프지 않겠는가. 내 마땅히 힘을 다하여 정리해서 예전대로 복고(復古)하리라 다짐하고는 이에 몸소 허물어지고 비 새는 곳은 보수하고 황무지같이 우거진 잡초를 베어버리고 나서 서울과 읍내 그리고 인근 마을 안팎으로 알려서 모든 일을 먼저 정비한 뒤 장부에 저축되었던 것을 정리해 보니, 중도와 불현 두 곳의 평수는 논이 80여 두락인데 싯가로 쳐서 1891냥을 환입(還入)하였고, 그 이듬해 경자년 봄에 수침, 가두, 지초, 중도 네 곳과 불현 단목곡의 논 120여 두락 싯가 2621냥을 환입하였고, 임인, 계묘 두 해 가을에 중도, 불현, 수침 세 곳의 밭 82두락 싯가 350냥을 환입하였다.

이 기간 동안 쓴 잡비는 1479냥에 이르렀고, 총계금 6341냥인데 이 가운데 논 120여 두락과 밭 82두락은 사중(寺中)의 향화(香火)자본으로 정하고, 논 80여 두락은 선방(禪房)의 것으로 정하였다. 이와 같이 나누어 정한 것은 모두가 깊은 뜻이 있었음이니, 사중과 선방의 모든 비용이 모두 사중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조목을 정해 놓고 선방 몫으로 한 것은 온전히 선방의 양식을 하기 위함이요, 또한 합해서 쓰면 뒷날 이 절을 관리하는 이가 간혹 절의 공용(公用)함이 많음을 빙자해서 선회(禪會)를 폐지할까 두려워서였으리라.

계묘년 동짓날부터 봄까지 염불회를 설치하고 여름 결제를 위해 선원을 차렸는데 지금까지도 선회는 폐지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임인년 봄에 각 법당과 요사채를 중수할 때에 불상과 16나한상과 관음상 2위를 개금(改金)하고, 후불 탱화 1위와 신중, 칠성 각 1탱, 달마 2탱, 독성 소상 2위를 새로 조성할 때 신도들의 기부금 외에 자비 부담금이 2143냥이었다.

무오년 여름, 범종루를 중수하면서 대승경전과 조사어록을 인쇄하고 지장 1, 관음 2, 법기 1 등 4보살상을 개금하였다.

기미년 여름 화엄회를 개설하고, 계해년 봄에 재차 각 법당과 요사채를 중수할 때에 자비 부담금 2943원이 들었다. 각종 과실 나무를 재배하는 태성원을 만들고, 불기와 일용집물을 알뜰하게 갖추어 놓았다.

갑진년 봄에 칠성계를 만들어 모금하고, 이자를 증식시켜 논 23두락을 2000냥에 매입하고, 지장계를 만들어 논 5두락 밭 6두락을 매입하여 상주(常住)의 자산을 삼으니, 이제서야 도량이 엄숙히 단정되고 중생과 제불보살이 희열하며 용폭의 물소리는 다시 태고의 가락을 연주하고, 종봉산의 산색은 마니주(摩尼珠)의 향운을 재현하도다. 

뒷날 주지와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장로의 뜻을 실추시키지 말고 성심으로 수호하여 상주물을 아끼고 보호하며 선원을 잘 이어나가 다함이 없이한즉, 한 등을 켜서 백천 등을 밝혀 밝음이 다함이 없이 되리니 그 공덕은 사방 허공과 같아서 헤아릴 수가 없도다.

만일 사사로운 욕심에 구애되어 권세에 기대어서 선실을 혁파하며 공공의 재산을 없애는 자는 죄업이 깊고 무거워서 반드시 악도에 떨어지리니, 두렵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조사가 이르기를, 

“선악이 분명하고 인과가 역연하니 천당과 지옥이 다만 눈앞에 있도다. 오호라! 뒤의 사람들은 가히 거울삼아 경계할진저.”

 

세존 응화 2960(1933년) 7월 어느 날 세움

봉래산인 한암중원 짓다

 

 

 

■ 原文 ■

余久住於五臺山上院寺로되 以泰病懶矣어늘 歲癸酉春에 佛影寺住持 朴淇宗이 來言曰 佛影寺는 新羅義湘祖師創建也라 其名價與星曆이 寔重且久요 而在李朝時에 興廢成毁가 雖有可據나 前麗朝時沿革은 都闕其史하니 今若無記면 則後之昧於今時事也도 亦猶今之昧於麗朝事也라 而今雪耘長老之作大功德於此寺者는 尤不可無傳이라 故欲建一碣하야 以記其事蹟焉하오니 師其無吝緖餘可乎아 余曰 旣立碑記事로되 而中間闕略則無乃令後之覽者로 興未盡之歎歟아 住持曰 若以闕於中而不記면 則又闕於今之事也라 與其全闕으론 不若記今而明明示於後人也라 余曰 善哉라하고 仍發緖言하노라 謹按古記에 新羅眞德王五年에 義湘祖師가 自東京沿海하야 入丹霞洞하야 登海雲峯北望하고 歎曰 西域天竺形이 移來海表也라하고 又見磵上에 生五佛影하니 益奇之요 尋流而下에 登金塔峯하니 則下有毒龍이라 湘師가 爲龍說法하야 請施地欲建刹호되 龍不順師어늘 以神力呪之하니 龍發憤하야 穿山裂石而去어늘 師卽塡湫而建刹震方하고 又建靑蓮殿三間과 及無影塔하야 以裨補之하고 額曰 天竺山佛影寺云이라 李朝太祖五年에 寺失火러니 六年에 小雲法師再建云이요 成宗五年에 白克齋 除蔚珍縣令하야 下車三日에 得고疾而卒하니 夫人李氏 問於吏曰 近境有可禱精寺否아 曰有라 寺名佛影이니 殿古而像靈이라 夫人이 令쫌棺하야 就寺之塔하고 焚香泣祝曰 妾夫亡命則已어니와 若橫夭則 伏祈覺天之濟라하고 か至三日夜러니 有一魔魅 披髮而走曰 今此覺天光中에 解十年寃結이로다 夫人驚悟하야 開棺視之하니 奄然還生이라 不勝歡喜하야 以塔寮爲歡喜寮하고 佛殿爲還生殿하야 因寫金字蓮經七軸하야 謝佛恩云이라 宣祖十一年에 性元法師가 建靈山殿及西殿하고 創南庵起東殿하니 而有雙鶴이 巢于寺西芙蓉城下라가 至壬辰元朝에 止南庭松楸上하야 잭然長鳴하며   翔數�而上天하고 井泉赤混하야 不食三日이러니 是年에 倭寇作亂하야 寺宇盡灰로되 唯西殿靈山殿獨存이어늘 性元이 又重創法堂과 及東西禪堂云이요 肅宗六年에 泰性法師가 改建禪堂하고 翌年에 創冥府殿이러니 而師本鄕人이며 俗姓 南이요 性質直不妄言語요 年十二에 從應哲長老受戒하고 �虎丘堂하야 證悟無碍하고 喜檀施하고 嚴戒律하야 臨終趺坐하야 寂然而化러니 茶毘之日에 瑞氣�空하고 得金光舍利三粒하야 建浮屠于寺東云이요 肅宗大王이 寵宮姬러니 姬讒王妃廢黜하니 妃欲自決이어늘 夢見一僧이 告曰 我自佛影寺來라 而明日에 有好祥瑞矣니 勿憂하라 하더니 果翌日에 宮姬의 謀事가 發露하야 伏罪하고 而妃得還宮이라 故로 賜寺山四面十里許四標하야 謝佛恩云이요 肅宗四十六年失火러니 而英祖元年에 天玉法師重創云이라 噫라 在於李朝에 小雲性元과 泰性天玉等 諸法師 相繼而起하야 隨毁隨成하야 昭有其蹟이요 而自羅至麗末히 七百餘年間에 重創修繕은 茫然無據라 蓋古有傳史로되 而或當�攸之變하야 入於흃燼耶아 抑遇兵火而爲賊奪去耶아 前塵暗黑하야 不可以考니 則凡有成就事業者 不可不詳記하야 以示後人也라 今擧雪耘長老之一生積功於此寺者는 以爲後日之龜鏡이라 長老名奉忍이요 俗姓李요 本岑南이며 宜寧人이라 年十四에 入雪嶽山五歲庵하야 依夢聖和尙하야 祝髮受戒어늘 而稟性勁直하고 行業勤儉하야 於理於事에 無不精密하고 而恒以利他爲心하니 人皆稱菩薩間生焉이라 光武三年己亥春에 訪到于此寺하야 探祖師之遺�이라가 山水絶勝하고 基址雄深하니 眞道人所居之地也로되 所嗟는 龍象已去요 狐狸爲窟하야 遺來土地는 掃空於濫用雜費하고 舊建堂宇는 �斜於風磨雨洗하야 滿庭荒草에 守護無人이러니 有志者 當此에 豈不心寒而骨   哉아 吾當盡力整理하야 期於復古라 乃已遂補缺漏하고 剪荒蕪하야 告京邑交隣里內外하야 諸事先爲齊整然後에 出束中所儲하야 中島佛峴兩坪畓八十餘斗落하니 價文一千八百九十一兩을 還入하고 翌年庚子春에 水砧加頭芝草 中島四坪과 與佛峴檀木谷의 畓一百二十餘斗落 價文二千六百二十一兩을 還入하고 壬寅癸卯兩年秋에 中島佛峴水砧三坪의 田八十二斗落 價文三百五十兩을 還入하니 這間用下雜費가 至於一千四百七十九兩하니 總計金六千三百四十一兩也라 而於中에 畓一百二十餘斗落과 田八十二斗落은 以寺中香火之資로 爲定하고 畓八十餘斗落은 以禪房條로 爲定焉이라 如是分定은 盖有深意하니 寺中與禪房의 諸般用費는 皆以寺中條爲出이로되 而禪房條는 專爲於禪粮也오 又倂合而用之면 則恐後之管理於此寺者가 或藉於寺中公用之多하야 廢其禪會故也라 自癸卯冬으로 至乙巳春히 設念佛會하고 夏結制로되 爲始設禪院하야 至于今히 不廢禪會也라 壬寅春에 各法堂과 及寮舍重修時에 佛像與十六羅漢像觀音像二位改金後佛幀一位神衆七星各一幀과 達磨二撑과 獨聖塑像 二位新造時에 檀越寄附金外에 自擔金二千一百四十三兩也라 戊午夏梵鍾樓重修時에 大乘經典과 祖師語錄印刷하고 地藏一 觀音二 法起一 四菩薩像改金하고 己未夏에 設華嚴會하고 癸亥春 再次各法堂과 及寮舍重修時에 自擔金二千九百四十三圓也라 各種果樹를 栽泰成園하고 而佛器與日用什物을 悉贍悉具하고 甲辰春에 始設七星契하야 募金殖利하야 畓二十三斗五升落을 價文二千兩으로 買入하고 又設地藏契하야 畓五斗落과 田六斗落을 買入하야 以爲常住之資하니 於是乎 寶坊嚴淨하고 人神喜悅하야 龍瀑水聲은 更奏太古之琴韻이요 鍾峯山色은 再現摩尼之香雲이라 後之住持와 與幹事之人은 不墮長老之志하고 誠心守護하야 保惜常住하고 繼續禪院하야 至於無窮이면 則可謂 一燈燃에 百千燈明하야 明無盡也라 其功德이 如四方虛空하여 不可量也라 若拘於私欲하고 倚於權豪하야 革罷禪室하고 擅裁公財者는 罪業深重하야 必墮惡途矣하니 可不戒懼아 故祖師云 善惡이 分明하고 因果歷然하니 天堂地獄이 只在目前이로다 嗚呼라 後之人이 可以鑑誡也夫인저

 

世尊應化 二千九百六十年 七月 日竪

蓬萊山人 漢岩重遠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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