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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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5-02-27 13:57 조회6,141회 댓글0건본문
鄭先生冑敎氏는 當世之望士也라 以晩惺으로 名其齋하고 囑余爲記어늘 屢辭屢至라 余不敢以不文而牢讓이라 故로 因以言之하노라. 夫聖人之學은 心學也라 身之主宰는 便是心이요 心之本體는 便是性이요 性之本源은 便是天이니 在天謂之命이요 在人謂之性이라 固知心也性也天也命也 其實一也라.
若論其心學이면 無內外無將迎하며 動亦定靜亦定하야 恁麽也如是하고 不恁麽也如是하야 恁麽不恁麽總如是而已라 果且有時分乎哉아 果且有迷悟乎哉아 故로 邵子曰 身生天地後로대 心在天地先이라 天地自我出하니 其餘何足言이리요하고 莊子曰 自其異者로 視之면 肝膽이 楚越也로대 自其同者로 視之면 萬物이 皆一也라 夫如是則安知秋毫之不爲大而泰山之不爲小며 又安知殤子之不爲壽而彭祖之不爲夭耶아하니라 傍有不肯者出來問曰 然則以晩惺爲號者는 何也오 毋乃存其時分이며 滯其迷悟며 有乖於聖人之學而又有妨於自修之道者歟아 曰子獨不聞夫아 維渙本來金이나 終以鎖成就之說乎아 抑不聞夫識氷池而全水나 藉陽氣以鎔消하고 悟凡夫而卽佛이나 資法力以熏修之道乎아 故로 易曰 一陰一陽之謂道니 繼之者 善也오 成之者 性也라 仁者見之에 謂之仁이요 知者見之에 謂之知로대 百姓은 日用而不知라 故로 君子之道 鮮矣라하니 此性修不二之法也라 何以知其然耶아 夫易은 雖無體나 無所不體니 非離陰陽而別有道也라 然이나 非善稱理而起修者면 不能繼陰陽以立極이라 而卽彼成位乎中者는 全是本性의 功能이어늘 乃世之重力行者는 往往이 昧其本性하니 是는 仁者見之에 謂之仁也라 世之重慧解者는 往往이 不尙修持하니 是는 知者見之에 謂之知也라 百姓은 又曰日用而不自知니 故로 君子의 全性起修全修顯性之道 鮮矣라 且也孟子 豈不云乎아 盡其心者는 知其性也요 知其性則知天矣라 存其心하고 養其性은 所以事天也요 夭壽不貳하고 修身以俟之는 所以立命也라하니 此知行合一之道也라 何以知其然也아 盡心知性知天은 豈非生知安行之事乎아 存心養性事天은 豈非學知利行之事乎아 夭壽不貳하고 修身以俟之는 豈非困知勉行之事乎아 曰然則晩은 是晩好是書之晩耶아 抑亦六十에 知五十九年之非之晩耶아 惺은 是惺惺不昧之惺耶아 抑亦惺惺寂寂之惺也아 曰古不云乎아 前念迷則衆生이요 後念悟則卽佛이며 前念着境이면 卽凡夫요 後念離境이면 卽聖이라 前前은 劣於後後하고 後後는 勝於前前故로 晩이요 孔子曰朝聞道면 夕死라도 可矣라하니 聞底는 是何道요 到這裏하얀 不容貶眼이요 不可更引吾道一以貫之者也라 故로 曰惺이라하니라 鄭大雅之晩惺名齋는 意在斯焉이요 而亦周子所謂士希賢賢希聖聖希天이니 天은 心學也라 客揖而謝曰 此非曲士俗儒之所能知也로소니 請得筆而存之하노이다 余遂爲之記如是하노라.
應化 二九九五年 戊申 乾月 晦日也
五臺山人 呑虛 金鐸聲 識
【번역】
정주교 선생은 당대의 훌륭한 선비이다. 그의 서재에 만성당(晩惺堂)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 여러 차례 사양할수록 그의 마음이 더욱 지극하여 감히 문장에 능하지 못한다는 말로써 끝까지 사양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게 된 것이다.
성인의 학문이란 심학(心學)이다. 한 몸의 주재는 마음이요, 마음의 본체는 본성이요, 본성의 근원은 곧 하늘이다. 하늘에 있는 이치를 명(命)이라 하고 사람에게 부여하여 있는 것을 본성이라 한다. 마음, 본성, 하늘, 명이란 실제로 모두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심학을 논하면 안과 밖이 없으며 보내고 맞이함이 없으며 동하여도 정(定)하고 고요해도 정하며 그럴 때도 이와 같고 그렇지 않을 때도 이와 같으며 이럴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모두 이와 같을 뿐이다. 과연 여기에 시간과 공간이 있을 수 있겠으며, 과연 혼미와 깨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소강절(邵康節: 邵雍)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몸은 천지가 생긴 뒤에 태어났지만 마음은 천지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다. 천지가 나에게서 나왔으니, 그 나머지를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장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다른 점으로 보면 한 몸의 간과 쓸개도 초나라 월나라처럼 동떨어져 있지만 같은 점으로 살펴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추호를 크다하지 않을 수 없고 태산을 작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한 일찍 죽은 사람을 장수하지 못했다 말할 수 있으며, 팽조(彭祖)가 요절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나의 곁에서 내 말을 듣다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서 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만성으로 당호를 삼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혼미와 깨우침에 집착하여 성인의 학문에 괴리(乖離)되고, 또 스스로 몸을 닦는 도에 방해된다는 말이 아닌가?”
나는 그에게 답하였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본래는 금이나 결국은 녹여서 기물을 만든다.’는 말을……. 아니 그 말도 듣지 못하였는가. 꽁꽁 얼어붙은 연못이 모두 물이라 하지만 따뜻한 햇살에 의해 녹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범부가 곧 부처라 하지만 법력을 힘입어야 닦여갈 수 있다는 도리를 깨닫지 못하였는가. 이 때문에『주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되는 소이(所以)를 도(道)라 하고, 이를 이어받은 것을 선(善)이라 하고, 이를 성취한 것을 본성이라 하니, 어진 사람은 이를 보고 어질다 하고, 지혜로운 이는 이를 보고 지혜롭다고 하지만 백성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 까닭에 군자의 도가 적다.’
이는 본성과 수행이 둘이 아닌 법이다. 무엇으로 그런 줄을 아는가.『주역』은 체(體)가 없지만 체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음양을 떠나서 도가 따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치를 잘 말하고 수행을 일으킨 자가 아니라면 음양을 계승하여 법을 세울 수 없다. 그 가운데 나아가 지위를 이루는 것은 모두 본성의 기능을 온전히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역행(力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그 본성에 대해서는 혼미하다. 이는 어진 사람이 보아야만이 인(仁)이라 말할 수 있다. 세상에 지혜로 이해하는 것을 중시한 자는 이따금 닦아 나가는 것을 숭상하지 않는다. 이는 아는 사람이 보아야만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백성은 또한 날마다 쓰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한 까닭에 본성을 온전히 하여 닦음을 일으키고 닦음을 온전히 하여 본성을 나타내는, 군자의 도가 적은 것이다. 또 맹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 마음을 다한 자는 본성을 알게 되고,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며,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함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며, 요절과 장수에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고 몸을 닦으면서 기다림은 명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앎과 행실이 하나의 도이다. 무엇으로 그것이 그렇다는 줄 아는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알고 하늘을 아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자연스럽게 행한 자의 일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며 하늘을 섬기는 것은 배워서 알고 이롭게 행하는 사람의 일이 아니겠는가. 요절과 장수가 둘이 아니며 몸을 닦으며 기다리는 것은 어렵게 알고 힘써 행하는 자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만(晩) 자는 이 글을 늦게사 좋아한다는 만(晩)인가? 아니면 60세에 59세의 잘못을 안다는 늦음을 말하는가? 성(惺)이란 성성불매(惺惺不昧)의 성(惺)을 말하는가? 아니면 성성적적(惺惺寂寂)의 성(惺)을 말하는가?”
“옛 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 앞 생각이 혼미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이 깨치면 곧 부처이며, 앞 생각이 경계에 집착하면 범부요, 뒷 생각이 경계를 떠나면 곧 성인이다. 앞과 앞은 뒤와 뒤보다 못하고 뒤와 뒤는 앞과 앞보다 훌륭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晩)이라 말한다.
공자는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니, 깨친다는 것은 무슨 도를 말하는 것일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눈 하나 깜짝함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의 도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을 인용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惺)이라 말한다.
정선생이 만성으로써 서재의 이름을 붙인 그 의의는 여기에 있다. 또 주렴계가 말한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성인은 하늘이 되기를 바랜다’고 하니, 하늘이란 심학을 말한다.”
그가 두 손을 공손히 잡고서 사과하였다.
“이는 저속한 선비로서는 알 수가 없으니, 청컨대 이를 기록하여 주십시오.”
나는 마침내 이와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불기 2995년(1968) 무신 4월 그믐
오대산인 탄허 김택성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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