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사는 智慧(부처님 오신날을 맞아)-1_대담/金恒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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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5-04-29 10:51 조회6,044회 댓글0건본문
〔1〕정신(正信)과 바른 삶
김항배 : 오늘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왔습니다. 우선 종교란 믿음이 뚜렷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왜 우리가 부처님을 믿게 되며 또 믿지 않을 수 없는지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 님 : 지금 많은 종교가 있고 믿음에 대한 정보가 있지만 불교사상에 비춰 보면 거의 정신(正信, 올바른 믿음)이라 할 수 없지요. 불교에 있어서도 정신(正信)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가 문제지요. 그럼 어떤 것이 정신인가. 주관 밖의 어떤 객관체를 믿는 대상이 있으면 이것은 바른 믿음이 아니며, 또 그렇다 해서 객관체가 없는 주관만이 서 있다면 이것도 또한 정신이 되지 못합니다.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완전히 없어진 믿음이라야 정신(正信)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그걸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참 믿음은 믿는다고 하는 생각까지 끊어진 믿음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소득(無所得, 얻는 바 없는 것)이 반야사상의 골자지만 이 믿음도 무소득(無所得)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항배 : 스님 말씀대로 믿는다는 것이 사유(思惟)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구별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있고 또 무소득(無所得)한 가운데 불가사의한 묘용이 있다는 것이 더욱 독특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불자로서 부처님을 믿고 또 생활 속에서 자신이 믿고 있는 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길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스 님 : 조금 전에 말한 주객이 끊어진 믿음은 실견득(實見得, 실제로 보고 터득함)이 필요하지만 일반인으로는 어렵지요. 다만 그것을 목표로 설정해 두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인으로서 그렇게까지는 못 된다하더라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길이 될 것인가.
옛날 어떤 학자가 사마온공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평생 행할 도입니까?” 사마온공은 “성(誠)이다. 성(誠)은 진실하여 거짓(妄)이 없는 것이다.”라 대답했지요. 다시 그 학자가 “그러면 먼저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하니 “망령되이 보지 말고 망령되이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보지 않을 것은 보지 말고 말하지 않을 것은 말하지 말고, 오직 바로 보고 바로 말하는 방법으로써 성(誠)을 행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세상에 처하는 데는 부드러운 것이 좋고 강하고 굳센 것은 화의 근원이 된다고 했어요. 처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아무인(無我無人), 즉 주객이 끊어진 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까 말한 것처럼 망령되이 보지 않고 망령되이 말하지 않는 것이 차선(次善)이지요.
김항배 : 헛되게 보지 말고 헛되게 말하지 말라는 것은 좋은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면 공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 즉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말과 방금 말씀하신 진실무망(眞實無妄)과 어떤 동이점이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스 님 : 시경(詩經) 300편을 한 말로 요약하자면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삿됨이 없다)’입니다. 사무사(思無邪)라 함은 중(中)의 자리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중(中)은 희(喜)․로(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慾) 등을 포함한 즉 모든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중(中)이라 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를 말하지요.
그런데 희로애락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일단 희로애락이 일어났다가 도로 절차에 합한다는 것이 중(中)인데, 사실 성인도 그것(희로애락)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인은 일어났다가 바로 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성(誠)이지요. 그러니까 본래 진실해서 망상이 없는 자리는 천도(天道)이며 진실무망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人道)입니다. 그러니 본래 진실무망한 데서 밝아진 것을 성(誠)이라 하고 밝은 자리로부터 밝아져서 진실무망인 것을 교(敎)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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