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佛敎曹溪宗宗正漢巖大宗師浮屠碑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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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4-22 12:21 조회8,069회 댓글0건본문
先師俗姓은 方氏니 溫陽人也라 諱重遠이요 漢岩은 其號也라 考諱는 箕淳이요 妣는 善山吉氏니 丙子三月二十七日卯時에 誕師於江原道華川하다 生而穎悟絶倫하야 甫九歲에 始就私塾하야 學史略할새 遂問於先生曰 天皇氏以前에 有什麽오 曰有盤古氏니라 又問曰 盤古氏以前에 有什麽오 先生不能答이어늘 自是以後로 博涉經史호되 往往疑着於盤古以前之面目이로되 而終不能決이러니 至二十二歲丁酉에 入金剛山長安寺하야 依行凜老師하야 祝髮而乃自誓曰 旣爲削髮染衣入山中인댄 見眞性하야 報親恩하고 往極樂이라 一日在神溪寺普雲講會하야 偶閱普照國師修心訣이라가 至若言心外有佛이요 性外有法하야 堅執此情하야 欲求佛道者인댄 縱經塵劫하고 燒身燃臂云云으로 乃至轉讀一大藏敎와 修種種苦行이라도 如蒸沙作飯이요 只益自勞處하야 不覺身心悚然하야 如大限當頭요 又聞長安寺海恩庵이 一夜燒盡하고 尤覺無常如火요 一切事業이 皆是夢幻이라 解夏後에 與同志含海禪師로 束裝登程하야 漸次南行하야 至星州靑岩寺修道庵하야 參聽鏡虛和尙의 說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라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라하고 眼光忽開에 盖盡三千界하니 拈來에 物物이 無非自己라 始覰得盤古以前之面目하야 更無餘疑하니 而時則師之二十四歲己亥秋也라 一日侍和尙喫茶次에 和尙擧禪要云 如何是實參實悟底消息고 答南山起雲北山下雨語하야 問大衆云 是什麽道理오 師答曰 開牖而坐에 瓦墻在前이로다 和尙이 翌日陞座告大衆曰 遠禪和功夫 過於開心云云이라 師一日에 看傳燈錄이라가 至藥山對石頭云 一物不爲處에 驀然心路忽絶하야 如桶底脫相似라 而其冬에 和尙入北地潛跡하야 更不相晤矣라 甲辰春에 赴通度寺內院方丈之請하야 隨緣度了六年光陰하고 而庚戌春에 散衆入孟山牛頭庵하야 過寒際에 獨在廚中着火라가 忽然契悟하니 與修道庵開悟時와 少無差異로되 而一條活路에 觸處分明하니 卽師之三十五歲時也라 偶吟聯句曰 着火廚中眼忽明하니 從玆古路隨緣淸이라 若人問我西來意면 岩下泉鳴不濕聲이라 村尨亂吠常疑客이요 山鳥別鳴似嘲人이라 萬古光明心上月이 一朝掃盡世間風이라 自此로 不入世間하고 不出世間하야 縱橫淋漓하며 生熟自在하야 隨時隨處에 大振禪風이러니 而至五十歲乙丑에 又自誓曰 寧爲千古藏蹤鶴이언정 不學三春巧語鸚이라하고 遂入于五臺山하야 二十七年을 不出洞口而終焉하니 享年七十六요 法臘五十四也라 初入五臺時에 以所持之楓木杖으로 爲看其日影하야 植之于中臺香閣之庭前이러니 而枝葉復生하야 于今成亭하니 義湘之植杖과 普照之遺蹟이 尤有符契於今日也라 師平素不喜著述하야 所著者 有一鉢錄一卷이어늘 而上院寺丁亥回祿時에 幷入灰燼하니 恨何可旣리오 師有得法弟子幾人而唯普門與暖庵은 志行超絶하야 頗振宗風이라가 普門不幸早世요 余雖侍參二十餘祀나 尙不得其門以入焉이니 則宗廟之美와 百官之富를 未足以盡見이요 而往在庚寅에 因南北之事變으로 引去于南方等地라가 翌年春에 示有微疾하사 到第七日朝에 喫飮一器粥一椀茶而屈指曰 辛卯二月十四日也라하고 至于巳時에 着袈娑 端坐而逝하니 自爾以來로 幽明遽隔이니 永慨玄眸積翳에 忽喪金鎞하고 慾海洪濤에 遄沈智楫이라 而侍者喜贊喜燮等이 收其闍維之靈骨而護之라가 至于今春에 造石塔而奉安之하니 石塔猶在나 德音無聞이라 嗚呼哀哉라 痛纏心腑로다 如上云云은 盖在摭實이요 枝葉華藻은 不暇務焉이라 銘曰
拔萃其姿는精金溫玉이요
鍊得其神하야氷壺濯魄이라
學兼內外하고道貫古今이라
霜松潔操요水月虛襟이라
境智俱寂하고定慧雙融하야
高提祖令하니星北水東이라
心珠道種은七淨交輝하고
戒月悲花는三空列耀라
諄諄之慈에物物斯安하고
乾乾之慮에心心靡間이라
始終抗節은金石比堅이요
淺深心要는貫花難肩이라
名重當時요道扇方外라
八表高人이輻湊階下로다
哲人云亡이니吾將安依요
卽事而理여塔鎖五臺로다
歲 世尊應化 二九八六年 己亥 三月 二十七日也
門人 呑虛宅成 敬撰幷書
【번역】
선사의 속성(俗姓)은 방씨이며 온양 사람이다. 이름은 중원이며, 한암은 그의 호이다. 부친의 이름은 기순이며 모친은 선산길씨이다. 병자년(1876) 3월 27일 묘시에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셨다.
나면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9살 되던 해에 글방에 나아가『사략(史略)』을 배우다가 선생에게 물었다.
“천황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반고씨가 있었다.”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글방 선생은 스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 후 널리 경학과 역사를 섭렵하였으나, 가끔씩 반고씨 이전의 면목에 대해 의심이 일어나곤 하였지만 끝내 이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22세 정유년(1897) 금강산 장안사에 들어가 행름(行凜) 노스님을 의지하여 삭발하고서 스스로 “이미 삭발하여 승복을 입고 산중에 들어왔으면, 참 성품을 깨달아 부모의 은혜를 갚고 극락에 가리라.”고 맹세하였다.
하루는 신계사 보운강회(普雲講會)에서 우연히 보조국사의『수심결』을 읽다가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 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하면, 오랜 세월을 소신(燒身) 연비(燃臂), 내지 일대장교(一大藏敎)를 읽으며 가지가지 고행을 닦을지라도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 스스로의 수고로움을 더할 뿐이다.”는 대목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오싹하여 마치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느꼈었는데, 또 장안사 해은암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불타 버렸다는 말을 듣고서, 무상함이 저 불과 같고 모든 일이 모두 몽환(夢幻)임을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여름 해제 이후, 뜻을 같이한 도반 함해선사와 함께 행장을 꾸려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 이르러 경허스님의 설법을 듣던 중,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는 말씀을 듣고, 안광이 문득 열리면서 3천계(三千界)를 덮어 다하니, 삼라만상 모든 것이 모두 자기 아닌 것이 없었다. 비로소 반고씨 이전의 면목을 깨달아 다시는 의심이 없었다. 이때 스님의 나이 24세 기해년(1899) 가을이었다.
하루는 경허스님을 모시고 차를 마시다가 경허스님께서『선요(禪要)』의 “어떤 것이 진실로 참구하고 진실로 깨달은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리도다.”라는 구절을 들어 대중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이에 스님이 답하였다.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瓦墻)이 앞에 있습니다.”
경허스님이 이튿날 법좌에 올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지났다.”
스님이 하루는『전등록』을 읽다가, 약산이 석두의 물음에 답하기를 “한 물건도 작용하지 않는 곳”이라는 데 이르러 홀연히 마음 길이 끊어진 것이 마치 통 밑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그 해 겨울 경허스님이 북쪽으로 들어가 잠적함으로써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갑진년(1904) 봄에 통도사 내원선원에서 방장스님으로 청하므로, 인연 따라 그 곳에서 6년 세월을 보냈다.
경술년(1910) 봄에 대중을 보내고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홀로 겨울을 보낼 적에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가 갑자기 깨달으시니, 수도암에서의 깨달을 때와 조금도 차이가 없었으나, 한 줄기 활로촉처(活路觸處)가 분명하였다. 곧 선사의 35세 때였다. 우연히 연구(聯句)를 읊었다.
부엌에서 불 붙이다 별안간 눈 밝으니
이로부터 옛길 인연 따라 맑아라
만일 나에게 서래의(西來意)를 묻는다면
바위 밑 샘물 흐르는 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삽살개 짖는 소리 길손 의심하고
산새들 울음소리 나를 조롱하는 듯
만고의 빛나는 마음 달이
하루 아침에 세간의 바람 쓸어 버렸네
이로부터 세간에 들어가지도 않고 세간에 나오지도 않고 종횡으로 활기차고 모든 일에 자재하며 때와 곳에 따라 선풍을 크게 진작하였다.
스님의 나이 50세인 을축년(1925)에 스스로 맹세하기를,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하시고, 이윽고 오대산에 들어가 27년간 동구 밖을 나오지 않고 열반에 드셨다. 향년 76세요, 법랍 54세였다.
처음 오대산에 들어갔을 때 짚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로 해그림자를 보려고 중대 향각 뜰앞에 심었는데, 다시 가지가 뻗고 잎이 돋아서 지금은 정자를 이루었다.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정자나무를 이룬 고사와 보조국사의 유적(遺蹟)이 더욱 오늘날에 부합되고 있다.
선사께서 평소에 저술을 즐기지 않으셔서 저술한 것이라고는『일발록(一鉢錄)』한 권이 있었는데, 상원사가 정해년에 불타 버릴 때 함께 타 버렸다. 이를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선사의 법을 얻은 제자가 몇 사람 있으나, 오직 보문(普門)과 난암(暖庵)이 지행(志行)이 뛰어나 종풍을 떨쳤으나 보문은 불행히도 일찍 별세하였고, 나는 비록 20여 년 모셨으나 오히려 그 문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나는 선사의 경지와 조예를 감히 엿보지 못하고 지난 남북사변(1950)으로 인하여 남방 등지로 갔는데, 이듬해 봄에 선사께서 미질(微疾)을 보이시고 이레째 되던 날 아침에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 드시고 손가락을 꼽아 세며 이르기를, “신묘(辛卯, 1951) 2월 14일이다.” 하시고, 사시(巳時: 09~11시)에 가사를 드리운 채 열반에 드셨다.
이로부터 유명이 문득 막혔으니 영원한 슬픔은 우매한 중생의 눈을 밝혀 줄 금비(金鎞, 한암스님)를 잃었고, 욕망의 바다 거센 파도에 허덕이는 중생들이 돛대를 잃었기 때문이다.
시자 희찬, 희섭 등이 선사의 사리를 수습하여 금년 봄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석탑은 있으나 음성은 들을 수 없으니, 아! 슬프다. 아픔이 폐부를 찌른 듯하다. 위에 한 말은 모두 실상만 추렸을 뿐 지엽과 겉치레에는 힘쓰지 않았다.
명문은 아래와 같다.
빼어난 그 모습
순수함은 금이요, 따사로움은 옥이라
닦여진 그 마음
맑고 빛나는 영혼이여
학문은 내외 경전 겸하였고
도는 고금을 관철하셨네
찬 서리 솔처럼 맑은 지조
강물 위 달마냥 텅 빈 마음
경계와 지혜가 모두 쉬어 고요하고
정(定)과 혜(慧) 모두 원융하네
조사의 법령 높이 드시니
별은 북두요 물은 동쪽으로 흐르네
마음 구슬과 도의 종자는
칠정(七淨)으로 서로 비추고
맑은 계행, 자비로운 덕은
삼공(三空)에 두루 비추어라
간곡하신 자비로
모든 만물 편안하고
쉼 없는 바른 생각
마음마음 끊임없네
시종 굳은 절개
금석에 비하랴
옅고 깊은 마음 자리
관화(貫花)로도 비할 수 없네
명성은 당시에 으뜸이요
도는 나라 밖까지 드날렸으니
팔방의 고명한 인재
섬돌 아래 모였는데
눈 밝은 이 돌아가시니
어디에 의지하랴
사법계(事法界)가 곧 이법계(理法界)라
탑만이 오대산에 남아 있네
불기 2986년(1959) 기해 3월 27일
문인 탄허 택성 삼가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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