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懸吐譯解 六祖法寶壇經』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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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9-05 09:39 조회7,969회 댓글0건본문
『懸吐譯解 六祖法寶壇經』序
슬프다. 팔만장경(八萬藏經)이 황엽(黃葉)으로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함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 단경(壇經)인들 어찌 홀로 그렇지 아니하랴. 백천중류(百川衆流)가 바다에 이르러 다한다면 성인(聖人)의 천언만어(千言萬語)는 한 물건에 이르러 다할 것이다. 한 물건이란 과연 무엇이냐? 뜨겁기로 말하면 타는 불과 같고 차기로 말하면 엉긴 얼음과 같고 빠르기로 말하면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몇 번 사해(四海) 밖을 어루만져서 거(居)할 때엔 깊어 고요하고 동(動)할 때엔 달려 멀어지는 것은 우리 중생의 분별심일 것이다.
이 분별심이 성자(聖者) 즉 각자(覺者)를 제하고는 하우(下愚)로부터 상지(上智)에 이르기까지의 설사 개세(蓋世)의 재능과 관고(冠古)의 학문과 탱천(撑天)의 제작(制作)이 있는 이라도 일분일초를 정식(停息)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옛적에 황제씨(黃帝氏: 마음의 비유)가 적수(赤水: 망상)가에 놀다가 현주(玄珠: 覺性)를 잃고서 지(知: 지혜 많은 신하)를 시켜 찾으려다 찾지 못하고, 또 이루(離婁: 총명한 신하)와 설후(說詬: 말 잘하는 신하)를 시켜서 찾으려다가 역시 종일토록 찾지 못하였다. 최후에 할 수 없어서 지혜도 총명도 웅변도 없는 망상(罔象: 일체상이 끊어짐)이라는 신하를 시키게 되어 곧 찾은 일이 있었다. 이 망상(罔象)의 경지를 가리켜서 혹은 심(心) 혹은 불(佛) 혹은 각(覺) 혹은 도(道) 혹은 선(禪) 혹은 이(理) 혹은 성(性) 등등의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나 이것은 일물(一物)을 표현하는 대명사에 불과한 것이요 일물의 실체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일물의 실체라 하랴? 만일 종편(終篇)의 “잎이 떨어지매 뿌리로 돌아가는지라 올 때에 입이 없다.”는 말후(末后) 일구(一句)가 일물의 실체를 여실히 폭로한 것이라면 과연 의논(議論)할 수 있으랴! 생각할 수 있으랴! 말과 생각도 붙지 못하거든 하물며 번역하며 강해(講解)할 수 있겠는가.
이 번역은 지난 겨울에 이삼자(二三子)의 찾아와 묻는 자를 위하여 원문연구의 교재로 한 것이요,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문법을 좇아 하다 보니 우리말로 표현이 건조무미한 점이 많다. 그러나 오직 경(經)으로서의 경(經)을 번역하였고 나의 사의(私意)가 개재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직 이 본(本)을 유포하려는 뜻도 없었는데 뜻밖에 서울 계시는 청신녀 강씨(姜氏) 법성화(法性華)가 부군(夫君) 김영하(金永河) 씨의 화갑(華甲) 기념으로 이 경을 유포코자 하여 원고를 청하므로 그 성지(誠至)의 마음에 감동되어 창졸히 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로 의논할 수 있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이 원경과 번역을 통하여 알 수 있으려니와 말과 생각으로 알 수 없는 말후(末后) 일구(一句)는 과연 무엇을 통하여 알아야 할 것인가! 이는 학자가 마땅히 일생을 통하여 마음을 다하여야 될 문제일 것이다.
세존(世尊) 응화(應化) 二九八六年(1959) 기해(己亥)
한제(寒際) 성도재일(成道齋日)
태백산(太白山) 일소굴(一笑窟)에서
역자 呑虛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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