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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와 술(術)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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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11-28 20:48 조회7,8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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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와 術의 차이

요즘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대체로 6․25 사변 같은 것이 언제 일어날까?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을 도(道)를 깨친 사람, 또는 그것이 도(道)인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술객(術客)이나 하는 짓이다.
도(道)는 아는 것이 끊어진 것이 도(道)이다. 아는 것, 즉 지식적인 사유가 완전히 끊어진 것이 도(道)이다.

그러면 술(術)과 도(道)의 차이는 무엇인가.
불교에는 6신통(六神通)이 있다. 여섯 가지의 신통 중에 누진통을 내놓고는 다 술(術)에 불과하다. 만일 육신통 가운데 누진통이 없다면, 아는 것이 붙어 있으니까 술(術)이 된다.

예컨대 우리의 육안(肉眼)은 일정한 시야 내에서만 볼 수 있을뿐 그 밖에는 볼 수 없다. 반면 천안통(天眼通)은 장외(障外), 즉 산이 수만 겹 겹쳐 있어도 그 장(障) 밖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타심통(他心通)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이다. 상대방이 먹고 있는 마음을 다 아는 것이다.중국 당(唐)나라 때 혜충국사(慧忠國師) 이야기이다. 당시 인도의 ‘대이삼장(大耳三藏)’이라는 이가 중국에 왔는데 타심통이 열린 분이었다. 혜충국사를 훌륭하게 받들고 있던 황제는 인도에서 온 대이삼장 법사에게 반해 버렸다. 그는 황제의 마음 움직이는 것을 전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황제가 혜충국사한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평소에 스님의 도덕이 제일 높은 줄 알았는데, 오늘 인도에서 온 대이삼장의 말을 들어 보니까 스님의 법력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 그래요? 그럼 그 스님을 이곳으로 불러 오시지요?”

이윽고 대이삼장이 들어오자 혜충국사가 말했다.
“그래, 그대가 타심통이 열렸다고 하는데 그 말이 옳소? 그대가 보기에 지금 내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 스님은 일국의 국사이신데 어찌 산중에 가서 잔나비 희롱하는 것을 구경하고 계십니까?”

혜충국사가 자기의 마음을 산 속에서 잔나비(원숭이)와 놀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냈던 것이다. 조금 있다가 또 말했다.
“지금은 내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 스님은 일국의 국사이신데 왜 천진교(天津橋) 위에 가서 뱃놀이(船遊)하는 것을 구경하고 계십니까?”

혜충국사가 또 마음을 그려 보냈던 것이다. 이윽고 혜충국사가 물었다.
“이번엔 내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이번엔 혜충국사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캄캄 절벽, 막연할 뿐이었다. 캄캄 절벽 보지 못하는 그 자리가 바로 도(道)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였기 때문에 인도의 대이삼장은 혜충국사의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단지 남의 마음을 안다는 건 술(術)이다. 인도에서 온 대이삼장이라는 이는 그저 타심통밖에 못 열린 것이었다. 타심통만 열린 것은 술(術)이지 도(道)가 아니다. 혜충국사가 자수용삼매(自受用三昧) 자리에 들어앉으니까 즉,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앉으니까 모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귀신도 보지 못하는 자리이다. 이때 혜충국사가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이 요상귀자(尿床鬼子: 변소간의 귀신새끼) 같은 놈! 썩 나가지 못할까!”

그 때서야 황제는 “참 과연 스님의 도덕이 장하십니다.” 하고 진심으로 머리를 숙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 근본이냐, 어떤 것이 지말(支末)이냐, 어떤 것이 안(內)이냐, 어떤 것이 밖(外)이냐, 이런 것을 식별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미래의 일을 훤히 안다는 것을 도(道)를 깨달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것은 점술이나 요술 따위이지 도(道)가 아니다. 도(道)는 마음의 본질을 터득하여 망념에서 벗어난 것을 도(道)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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