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정립해야 한다(10)_대담/鮮于 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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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08-29 12:47 조회6,920회 댓글0건본문
〔10〕이참(理懺)·사참(事懺)으로 구원받아
선우 : 스님 말씀을 듣고 보면 사람은 뜻을 두고 살아야하는데 죄를 많이 지어 오히려 극악(極惡)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극악한 죄악도 구원받을 수 있는지요?
스님 : 물론이지요. 구원받을 수 있다 뿐입니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참(事懺)이요, 다른 하나는 이참(理懺)이라는 것입니다. 사참(事懺)이란 밖으로 참회하는 것으로, 죄를 범했을 때 불전(佛前)이나 선지식(善知識) 앞에 죄상을 발로하여 서광(瑞光)을 보거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참(理懺)은 죄상(罪相)이 본래 없는 도리를 내적(內的)으로 관조(觀照)하여 백년동안 지은 죄를 한 생각으로 없애는 것이지요. 관조(觀照)하는 법은 “죄가 어디서 생기는가? 죄(罪)는 망상(妄想)에서 생긴다. 망상(妄想)은 어디서 생기는가? 마음에서 생긴다. 마음은 어디서 생기는가? 마음은 생기는 곳이 없다. 마음이 생기는 곳에 없는데, 죄가 어느 곳에 있겠느냐?”는 식으로 죄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예화(例話)를 하나 들어보지요.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평양(平壤)에 무착(無着)스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암자에서 수도(修道)하고 있었지요. 평양의 한 귀가(貴家)에 청춘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약혼자가 죽어 결혼식도 올려보지도 못한 채 옛 풍속대로 수절(守節)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음양지락(陰陽之樂)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체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궁금했지만 하소연할 길이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무착(無着)스님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그 여자는 기도한다는 핑계로 쌀 몇 가마니를 싣고 암자를 찾아갔지만 목적은 딴 곳에 있어 밤에 스님 방에 홀로 들어가 자기 의사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무착(無着)스님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사흘 밤을 반복하고도 끝내 거절당한 그 여자는 무착(無着)스님에게 “한을 풀지 못할 바에야 자살하고 말겠다”고 말하고 높은 바위로 올라갔습니다. 무착(無着)스님이 생각하기를 살․도․음․망․주(殺․盜․淫․妄․酒) 오계 중 살계(殺戒)가 제일(第一)에 있고 음계(淫戒)가 제삼(第三)에 있는데, 내가 음계(淫戒)를 파(破)하지 않기 위해 살계(殺戒)를 범한다면 이는 경중(輕重)을 모르는 것이다고 하여 여자를 불러 소원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여자도 보통사람이 아닌 대인(大人)이었나 봅니다. “원을 풀어주어 대단히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이만하면 일생수절(一生守節)할만 하다면서 되돌아갔습니다.
음계(淫戒)를 범한 일 때문에 무착(無着)스님은 당시 유명한 율봉 선사(栗峯禪師)를 찾아가 문 밖에 거적자리를 펴놓고 참회를 구했습니다. 율봉(栗峯)이 무착에게 “네가 참회를 하러왔다니 내가 너를 위해 참회를 시켜주겠다. 죄상을 네 앞에 놓인 소반 위에 낱낱이 적어 바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무착이 주먹으로 상을 치며 “죄상이 본래 없는데 어디 들어 바칠 게 있겠습니까?”하니 율봉이 손을 잡으며 “어! 참회 잘했다. 위로 올라오너라!”고 했답니다.
성경(聖經)에서는 “네가 아무리 착한 일을 했어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날 너는 지옥이요, 네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하나님을 믿는 날 너는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대명사입니다. 만일 진리의 대명사가 아니라면 이는 모순된 말입니다. 진리의 대명사이기 때문에 진리를 부정하는 날 지옥(캄캄한 세계라는 말)이고 진리를 믿는 날 천국(맑고 깨끗한 세계)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선우 : 좀 속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신부나 수녀가 되고 비구나 비구니가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자(孔子)의 말씀에 “조문도(朝聞道)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라” 즉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可)하다고 했는데 인류가 하루아침에 도통(道通)한다면 모두 죽어 없어져도 좋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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