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찾아 찾아 떠나는 오대산 선재길 트레킹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세계일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3-12-05 10:17 조회1,895회 댓글0건본문
깨달음 얻기 위해 먼 여정 나선 선재동자처럼/겨우내 눈 쌓인 선재길 타박타박 걸으며 한해 살아갈 지혜 얻어볼까/번뇌가 사라지는 길 오르면 천년고찰 상원사/월정사 전나무숲길엔 피톤치드 가득
하늘이 뚫렸나. 간밤에 내린 폭설은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렸다. 성능 좋은 방음 장치처럼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해 버린 듯, 숲은 고요하다. 들리는 건 오로지 “뽀드득 뽀드득” 발목까지 차오른 눈길을 헤쳐 내는 발자국 소리뿐. 세상 살다 보면 가끔 힘들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자신감과 목적을 잃고 방황할 때 세상을 헤쳐 나갈 지혜를 얻길 소망하며 구도자의 심정으로 걷는다.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지는 오대산 선재길을 따라 타박타박.
◆지혜를 찾아 떠나는 선재길 트레킹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선재길은 1960년대 말 도로가 나기 전부터 스님과 불교 신도들이 다니던 길로 월정사에서 동피골을 거쳐 상원사까지 약 9㎞ 이어지며 편도 3시간 정도 걸린다. 사계절 걷기 좋은 곳이다. 월정사∼동피골 구간은 트레킹 내내 계곡이 따라다니며 신갈나무, 단풍나무가 울창하고 다양한 야생화도 여행자를 반긴다. 조릿대숲길과 빽빽한 전나무 숲길이 이어지며 멸종위기 희귀식물 30여종을 복원한 자생식물관찰원도 들어서 있다. 대부분 평지여서 걷기 좋지만 상원사에서 길이 끝나 다시 월정사로 돌아 나와야 하는데 왕복 18㎞ 코스를 한꺼번에 소화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큰 걱정 할 필요 없다. 힘이 들면 진부역∼월정사∼상원사를 오가는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선재길 곳곳의 진출입로마다 버스정류장이 있고 중간 중간에 주차할 곳도 있어 원하는 구간만 짧게 둘러봐도 된다. 전 구간을 다 걸어야 지혜를 얻는 것은 아니니까.
선재길은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동자)에서 유래됐다. 선재는 ‘어떻게 하면 진정한 보살이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안고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보살인 문수보살을 시작으로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현인 53명을 만나는 여정을 떠난다. 월정사를 지나 오대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선재길로 들어서자 얼마나 눈이 많이 왔는지 발이 푹푹 빠진다. 아무 생각 없이 하얀 눈을 즐기며 걷다 보니 번잡하던 머릿속은 눈처럼 깨끗하게 비워지는 느낌이다. 선재의 깨달음을 얻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으니 뭔가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걷기 좋은 곳이다.
길은 계곡을 오가며 산림철길∼조선사고길∼거제수나무길∼화전민길∼왕의길 등 5개 테마로 이어진다. 선재길에는 일제강점기에 상원사까지 철길을 깔아 오대산의 울창한 소나무, 박달나무, 참나무 등 27종 나무를 벌채한 뒤 주문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한 아픈 역사가 남아 있다. 그래도 지금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다시 이뤘으니 참 다행이다.
회사거리를 거쳐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보관하던 조선사고 표지판이 보이면 섶다리가 등장한다.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붙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섶다리 위에 섰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는 10∼11월에 마을 사람들은 작은 다리를 만들어 겨우내 오대천을 건너는 데 이용했다. 잘 썩지 않는 물푸레나무와 버드나무로 다리 기둥을 세우고 참나무나 소나무로 만든 상판에 섶(잎이 달린 잔가지)을 깔아 만든 임시 다리는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떠내려가 ‘여름다리’로 불렸단다.
조금 더 오르면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도 보인다. 커다란 바위로 만든 돌다리는 얼음과 눈으로 덮여 운치를 더한다.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겨울이 길어도 봄은 오겠지. 돌다리 위에 서서 온통 얼음으로 변한 계곡을 배경 삼아 멋진 인생샷 하나 남기고 또 그냥 걷는다.
◆상원사 ‘번뇌가 사라지는 길’ 올라볼까
오대산장·자생식물관찰원∼신선골 출렁다리∼화전민 마을 흔적을 지나 마지막 구간 왕의길로 들어서면 ‘적멸보궁 문수성지’ 표지석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상원사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 신라의 승려 자장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을 나눠 봉안한 적멸보궁은 모두 다섯 곳. 경남 양산 통도사, 속초 설악산 봉정암, 태백 함백산 정암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상원사다.
724년(신라 성덕왕 23년) 자장대사가 세운 상원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평소 피부병이 심하던 세조는 상원사 계곡의 물로 몸을 씻다 동자승을 만나 등을 밀게 했다. 세조가 “어디를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자 동자승은 웃으면서 “어디를 가든지 문수보살을 직접 봤다고 하지 말라”며 홀연히 사라졌다. 세조는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크게 감격해 화공들에게 동자승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노승이 세조가 본 문수보살과 똑같은 그림을 남기고 사라졌고 이에 세조의 딸 의숙공주 부부가 1466년 문수보살상을 조성했는데 바로 상원사 문수전에 있는 목조문수동자좌상이다. 상원사 입구 관대걸이는 세조가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 놓은 곳을 기념해 만든 표지석.
상원사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서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라 적힌 안내판이 여행자를 맞는다. 번뇌가 사라진다니. 벌써 머리가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오대서약’이란 안내문도 보인다. ‘하나, 다른 생명을 아끼면서 함께 살아갑시다. 둘, 남의 것 욕심 내지 말고 자기 살림을 아낍시다. 셋, 맑은 몸과 정신을 지니고 바른 행동을 합시다. 넷, 남을 존중하고 말씀을 아낍시다. 다섯, 밝은 생활을 하면서 좋지 못한 것을 하지 맙시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갑자기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욕심은 무한대로 늘어났고 남보다 나를 존중했으며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말을 더했으니 말이다. 그래, 올해는 좀 달라지자. 올해의 버킷리스트 하나 마음에 깊이 새기고 눈 쌓인 계단을 오른다.
‘천고의 지혜 깨어 있는 마음.’ 계단 끝 2층 누각 청풍루 처마에 적힌 글귀도 작은 울림을 전한다. 청풍루 청량다원에선 따뜻한 차를 즐길 수 있다. 청풍루를 지나면 오층석탑 뒤에 앉은 아담한 문수전이 보인다. 문수전 앞에 두 마리 고양이 석상이 눈길을 끄는데 역시 세조와 관련 있다. 세조가 법당으로 들어가려 할 때 고양이들이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못 들어가게 했는데 알고 보니 자객이 숨어 있었다. 고양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고양이에게 ‘묘전’이라는 밭을 하사하고 석상을 만들게 했다고 전해진다. 문수전에는 국보인 목조문수보살좌상도 모셔져 있다. 문수전 앞 동종각에는 국보인 상원사 동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으로 725년(신라 성덕왕 24년)에 만들어졌다.
◆생명력 가득한 월정사 전나무숲길
버스로 다시 월정사로 돌아오니 오후 3시. 해는 아직 높이 떠 있을 시간이지만 전나무숲길은 벌써 산자락 그늘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다. 해발 1563m 비로봉 등 월정사를 감싸 안은 높고 험준한 오대산 봉우리들이 산사의 낮 시간을 아주 짧게 만들어 버리는 탓이다. 일주문을 지나자 하늘을 향해 장쾌하게 쭉쭉 뻗어 올라간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여행자를 맞는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니 폐가 숲의 상쾌한 기운으로 채워진다.
평균 수령 300년인 전나무 1700여그루가 울창한 숲을 꾸미고 있는데 최고 수령은 370년 정도. 원래 600년 수령 ‘할아버지 전나무’도 있었지만 2006년 쓰러지고 말았다. 숲길 중간쯤에서 생명을 다한 뒤에도 여행자들에게 그루터기로 포토존을 제공하는 할아버지 전나무를 만난다. 광릉 국립수목원, 내소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으로 꼽히는 월정사 전나무숲길은 일주문에서 월정사 금강교까지 1㎞ 남짓 이어져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길을 걷다 활기차게 걷는 스님들을 마주한다. 산책하는 시간인가 보다. 아주 맑고 환한 스님들 얼굴을 보니 덩달아 내 마음에 고요한 평온이 찾아온다.
2023-02-04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