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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정부, 오대산본 실록·의궤 미반환 매우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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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1-06-08 15:49 조회4,0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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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본 실록·의궤환수위원회 대표
제4교구본사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강원지역 백성·관리·스님들이 지켜낸 유산…문화재 이상 가치
민간단체 힘으로 돌아왔지만 보존 시설 문제로 또 ‘타향살이’
“정부, 불자·도민 염원 외면하지 말고 문화재 반환에 나서야”



일제강점기 밀반출됐다 국내로 반환됐지만 원소장처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궤의 환지본처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강원도의회는 6월1일 성명을 내고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 등을 반환하지 않는 정부의 입장은 과거 우리 문화재를 침탈해 갔음에도 돌려주지 않고 있는 서구의 침탈 논리와 닮아 있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이런 가운데 조계종 4교구본사 월정사를 비롯해 불교계 및 민간단체 등이 환수위원회를 구성, 정부 측에 문화재 반환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문화재 반환운동의 중심에 있는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을 최근 만났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궤 환수위원회가 다시 출범했다. 이번에는 대상이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이다. 소회가 어떤가.

2006년 불교계가 중심이 된 민간단체의 노력으로 일제강점기 약탈됐다 일본 도쿄대학과 궁내청에 소장돼 있던 오대산본 실록·의궤가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은 험난했다.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재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불교계 및 강원도민, 시민단체의 염원이 모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이렇다 할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및 의궤를 돌려주지 않는 정부의 대응이 매우 유감스럽다.

▲문화재가 오대산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문화재는 원래 있던 위치에 있을 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및 의궤에는 이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려 했던 당시 오대산에 거주했던 스님들과 민초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오대산사고본이 제자리를 벗어난다면 그 가치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오대산사고본이 환지본처한다면 불교계와 강원도민들은 선조들의 숨결이 담긴 문화재를 통해 문화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실의궤’는 어떤 문화재인가.

선조39년(1606) 왕실의 기록을 보존하고자 설치했던 오대산사고에 소장됐던 기록유산이다. 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에 걸친 조선왕조 역사를 담아냈다. 의궤는 국가·왕실에서 진행된 행사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당시 왕실은 오대산 주지를 사고수호총섭으로 임명해 오대산사고의 관리책임을 맡겼다. 이에 스님들은 사고 옆에 수직사(守直寺)를 건립해 머물며 기록물들이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도왔다. 곰팡이와 좀으로부터 기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시로 햇볕과 바람에 말리고 기록유산이 자연 소실되는 것을 최소화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2006년 일본으로부터 실록·의궤를 환수할 때 정부가 어떤 입장이었나.

그 당시 정부는 직접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정부가 1965년 일본정부와 맺은 한일협정 때문이었다. 이 협정으로 정부는 일본이 앞서 돌려준 문화재 외에 더 이상 반환을 요구하는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불교계가 중심이 된 민간단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오대산사고의 관리 책임자였던 월정사 주지 명의로 소송을 제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 오대산사고본이 국내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대산사고본은 정작 원소장처로 돌아오지 못했다. 왜였나.

오대산에 조선왕조실록 및 의궤를 보존·관리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는 이유였다. 환수운동을 주도했던 불교와 민간단체는 납득할 수 없었다. 오대산사고 앞에서 환국고유제가 끝나고 실록과 의궤가 다시 서울로 향하자, 불자·도민들은 ‘돌려줄 수 없다’며 찻길을 막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그렇지만 문화재의 보존을 위한 시설이 없다는 것을 막을 명분이 부족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정부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정부가 오대산에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는 시설을 건립하면 돌려주겠다는 말을 믿었다.



▲환국고유제에서 당시 문화재청장이 했던 발언도 문화재 환수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요인이 됐다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오대산사고본 실록 및 의궤 환국고유제에서 “오대산에서 문화재를 관리할 수 있는 인력·시설이 갖춰지면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한 국회의원도 “문화재청이 (오대산에 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는 예산) 50억을 확보해뒀다”고 말했다. 불교계와 강원도민은 이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2012년 7월 오대산사고본 실록 및 의궤 관리주체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지정했다.

황당했다. 당시 문화재청은 고궁박물관이 왕실전문 박물관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궁궐과 관련한 기록유산이면 모두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어야 하나. 같은 논리라면 불교와 관련된 불상, 불화, 석탑은 모두 사찰 성보박물관에 있어야지 왜 국립박물관 등에 있는 것인가.

▲문화재청의 이 같은 발표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나.

문화재청의 발표 다음날 ‘제자리찾기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공동대표였던 이광재 의원과 김진선 전 도지사 등과 함께 성명을 내고 “(문화재청의 이번 조치는) 중앙만 생각하는 전형적인 조직 이기주의”라고 비판했다. 이 무렵은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선정됐던 시기였다. 염동열 의원도 문화재청의 업무보고에서 “평창을 찾은 세계인에게 실록·의궤를 보여줘야 한다”고 거듭 지적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실록과 의궤의 영인본(복사본)을 보내왔다.


▲2019년 11월 월정사 앞에 실록·의궤만을 위한 박물관이 설립됐다. 어떻게 짓게 됐나.

문화재청이 당시 내세웠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지자체도 공감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지원도 받았다. 3500여m² 규모의 지상 2층으로 건립됐다. 박물관은 오직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실의궤’을 위해 건립됐다. 항온·항습장치는 물론 보안 시스템도 갖춘 최첨단 시설이다. 박물관의 학예연구사들은 실록·의궤가 돌아왔을 때 활용할 새로운 전시기법을 연구 중에 있었다.

실록·의궤 박물관에 문화재청 예산도 투입됐다고 들었다. 오대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에 공감한 것 아닌가.

그렇다. 오대산 조선왕조실록·의궤 박물관을 짓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지자체, 월정사 자부담까지 합쳐 131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애초에 박물관이 건립되면 문화재를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이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최근 문화재를 본래 있었던 자리로 보내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안동 하회탈(국보)은 2017년 안동시민의 품으로 돌아갔고, 지광국사탑(국보)도 원주로의 귀향을 앞두고 있다. 따라서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를 오대산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실록·의궤박물관을 건립한 이후 문화재청에 환수 요청을 했나.

아직까지 공식적인 대응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재청장이 박물관 개관식에서 약속을 한 바 있고, “오대산본 실록·의궤를 돌려달라”는 불자들과 도민들의 염원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최근 강원도의회도 성명을 냈고, 최문순 도지사도 환수에 적극적인 의지를 밝히고 있다. 문화재청도 간접적으로라도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오대산본 실록·의궤가 돌아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하겠다. 과거처럼 문화재를 수집, 보관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과거처럼 단순히 문화재를 전시하고 관람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문화재라는 아이콘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산업을 성장시켜야 한다. 지역경제도 여기에 달려있다. 조선시대 월정사 주지스님이 그랬듯, 현대의 수호총섭으로서 오대산본 실록 의궤를 바탕으로 이 시대에 맞는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소명을 다하겠다.

▲불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일제강점기 약탈됐던 실록과 의궤가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불교계 역할이 컸다. 조계종 중앙신도회가 적극 나섰고, 많은 불자들이 큰 관심과 성원을 보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불교계가 지켜온 소중한 성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국내로 돌아온 우리 선조들의 소중한 문화재가 환지본처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선대 사부대중의 피땀이 서려 있는 문화재가 고궁박물관의 수장고에 갇혀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불자들의 성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꼭 함께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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