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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한 장의 사진] ⑭ 인보 대종사의 출가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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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0-11-17 11:35 조회3,3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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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나게 공부하던 그 시절 ‘평생의 원동력’
설해목(雪害木)을 팔아 절 살림을 꾸려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친일 잔재와 왜색 불교를 타파하고자 했던 정화운동이 한창이던 1950년대의 사찰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가난 속에서도 불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불사들이 이곳저곳에서 이어졌다. 비록 가난 했으나 그 가난은 치열한 수행과 공부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 출가의 길을 걸은 스님들의 발자취 속에서 한국불교의 힘을 엿볼 수 있다.

1966년 2월 은사 탄허스님과 방산굴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인보스님 외에도 양운스님, 삼보스님, 삼지스님, 법달스님, 법등스님(뒷줄 왼쪽부터)이 서 있다. 표정은 제각각이지만 당당함이 묻어나는 자세다.
1966년 2월 은사 탄허스님과 방산굴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인보스님 외에도 양운스님, 삼보스님, 삼지스님, 법달스님, 법등스님(뒷줄 왼쪽부터)이 서 있다. 표정은 제각각이지만 당당함이 묻어나는 자세다.
 


#1  
15살 되던 195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갔다. 가난 때문이었다. 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다. 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굶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곧바로 행자가 됐다. 월정사는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뒤 겨우 인법당과 함석집의 서별당이 있었다. 행자들이 묵을 요사채라고는 없었기에 법당이 곧 요사채가 됐다. 행자들은 법당에서 칼잠을 잤다. 지금의 법당이 준공된 해가 1970년이다. 

행자생활 3년, 공양주이기도 했고 채공이기도 했다. 또 부목의 역할도 했고 다같이 농삿일을 했다. 공들인 농사는 시원치 않았다. 수확할 수 있는 쌀이 턱없이 적었다. 그야말로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2  
인보스님은 탄허스님 문하에서 출가했다. 탄허스님이 내린 법명은 인보(忍寶). 좋은 것도 참고 나쁜 것도 참으라며 절집에서 살려면 인(忍)이 많이 필요하다고 일렀다. 제자가 바라본 은사 스님은 대단한 어른이었다. 경전을 보지 않고도 달달 외웠고 한문 경전도 번역서가 따로 필요없이 바로 읽어내렸다. 탄허스님은 월정사에 이어 삼척 영은사에 수도원을 열어 젊은 학인들을 모았다. 수도원은 지금의 학제로 보면 강원과 비슷하다.

탄허스님이 월정사에서 열었던 수도원을 접고 영은사로 옮길 때 따라 나섰다. 1959년의 일이다. 영은사는 논 100마지기가 있어 월정사 보다 사정이 나았다. 후학을 키우고자했던 탄허스님에게는 영은사가 더 좋은 여건을 갖고 있었다. 

탄허스님은 영은사로 옮기자마자 다시 수도원을 열었다. 이 때 모인 스님들이 지금은 입적한 녹원스님(직지사 조실)과 정무스님(전 원로의원), 혜거스님(금강선원 회주), 도원스님(파계사 조실), 법등스님(제2석굴암 회주) 등이다. 

인보스님은 영은사에서 탄허스님을 시봉하며 채공 소임을 살았다. 학인들과 함께 공부하며 뒷바라지까지 도맡았다. 배움의 열정이 살아있던 그 때가 가장 재미있을 때로 남아있다. 이 때의 기억은 평생 출가생활의 원동력이다.

100마지기 논 가운데 절반은 주민들에게 나누어 짓도록 했고, 나머지 절반은 절에서 직접 농사지었다. 모든 대중이 함께 울력했다. 그 많은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락이 익으면 타작해 방아를 찧으면 30가마가 넘게 나왔다. 이것을 뒤주에 담아두면 1년은 거뜬하게 날 수 있었다. 

#3  
탄허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시절이 가장 신심 나던 때였다. “시간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해라.” 탄허스님은 인보스님에게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인보스님은 은사 스님을 생각하면 늘 죄스럽다. 대단한 은사를 만나 도를 배웠으나 이를 제대로 알리지 못했으니 죄인이라 여기는 것이다. 

인보스님은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다. 주지로 부임했던 홍천 수타사와 강릉 보현사에서도 농사를 손에서 떼지 못했다. 영은사에서 짓던 농사가 평생의 업이 됐다. 몽은암에 와서도 야산에 있는 1000평의 밭을 일구고 있다.

밭일을 거두고 들어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옛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새벽 댓바람부터 지게에 지고 10리를 걸어 방앗간에 맡겨놓고 학인들과 먹었던 밀가루 수제비 맛이 떠오른다. 바닷가가 내려다뵈는 언덕에서 시간을 보내다 석양이 저물 즈음 영은사로 돌아와 칼국수를 끓여먹을 때의 추억에 웃음을 짓곤 한다. 

인보스님은 따로 사진첩을 두지 않았다. 겹겹이 쌓인 봉투를 꺼내 옛 사진을 하나둘 들추며 생각에 잠겼다. 아련한 눈빛이다. 사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은사 스님과 찍은 사진이 몇 남지 않았다. 1966년 2월 탄허스님의 주석처였던 방산굴 앞에서 찍은 사진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의자에 탄허스님이 앉아 있고 제자들이 뒷줄에 서서 찍은 사진이다. 인보스님 외에도 양운스님, 삼보스님, 삼지스님, 법달스님, 법등스님이 서 있었다. 제각각 표정이지만 당당함이 묻어난다. 

영월=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불교신문3629호/2020년11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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