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공개] 탄허스님 입산 직전 대유학자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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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0-12-10 16:54 조회3,435회 댓글0건본문
“스승 구하고 진리 탐구하는 청년 열정 생생”
탄허스님이 입산 1년 전인 1933년 10월 유학자 하회봉 선생에게 보낸 편지 전문. 자료제공=윤창화 민족사 대표
1933년 하회봉선생에 진리 청해
20대 ‘청년 김택성’ 고민 엿보여
정념스님 "귀하고 소중한 자료"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지식으로 존경받는 탄허스님이 입산하기 직전에 쓴 편지가 확인됐다. 이 편지는 1933년 10월 10일 영남의 대유학자인 하회봉(河晦峰) 선생에게 보낸 것으로 탄허스님의 세속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다. 하회봉 선생의 본명은 하겸진(河謙鎭, 1870~1946)으로 구한말을 대표하는 유학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선생의 제자이다.
탄허스님은 이 편지에서 “요즘 서양 사조(思潮)가 날이 갈수록 넘쳐나고 있으며, 이설(異說, 기독교 교설)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자의 정신과 가르침이 사라져 가고 있다”면서 외국 사상이 들어와 전통 학문과 도가 쇠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스님은 편지에서 서양 풍조나 기독교의 전파에 유생이나 선비들이 앞장서고 있는 비판도 제기하였다. “근래 소위 선비라는 자들이 이단 이설(천지창조설, 유일신 사상 등 기독교 교리)을 물리쳐 버려야 함에도, 오히려 동조 찬양하여 공자의 가르침 위에 두고 있으며, 더욱 한심한 것은 천하의 대중을 부추겨 추종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잘못됨이 너무 심합니다.”
이 편지에서 탄허스님은 “바라는 바는 선생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 저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자 한다”면서 “선생께서 저를 내치지 않으시다면 저 택성(鐸聲)의 지극한 소원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라고 하회봉 선생 문하에 들어가 수학할 것을 청하였다.
하회봉 선생에게 보낸 편지 봉투의 앞면. ‘경남 진주군 수곡면 사곡리 하회봉 선생 석하 복정’이라 적혀있다.
하회봉 선생이 답장을 보냈는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일제의 식민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 초반 ‘청년 김택성’은 한국사회에서 동양전통이 훼손되어 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진리 탐구를 위해 백방으로 스승을 찾는 그 당시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어 의미가 크다.
‘청년 김택성’은 회봉선생에 편지를 보낸 1년 뒤인 1934년 한암선사가 주석하고 있는 오대산 상원사에 입산하였다. 유불선(儒佛仙)에 천착(穿鑿)한 탄허스님은 세 가지 가르침을 회통(回通)하여 교학 연찬과 강의, 저술 활동 등을 통해 후학을 지도하며 한국불교 중흥의 토대를 마련했다.
탄허스님의 출가 전 편지를 공개한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스님의 입산 직전 생각과 심정 등 여러 가지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편지”라면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기독교 등 서양 문물과 유학의 급격한 쇠퇴 등으로 사상적, 정신적 고뇌가 많았던 것 같다”고 밝혔다.
제4교구본사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은 “이번에 공개되는 탄허스님의 편지는 더 없이 귀중한 자료”라면서 “학문과 진리를 갈구했던 젊은 청년의 순수한 열정을 편지에서 확인 할 수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은 “큰스님께서는 ‘학문은 바다와 같이 끝이 없다’는 학해무변(學海無邊)의 말씀을 자주 하셨다”면서 “스승을 구하고 진리와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는 오늘날의 구도자들에게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편지는 한암선사와 하회봉 선생 등으로 대표할 수 있는 불교와 유교를 놓고 진로를 고민하던 청년시절을 객관적으로 입증한다는 탄허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편지 봉투 뒷면에는 ‘전북 정읍군 임압면 대흥리 김택성’이라 적혀있다.
* 다음은 탄허스님이 하회봉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윤창화 민족사 대표가 한글로 풀이한 것이다.
하회봉 선생 석하
김택성(金鐸聲, 탄허스님의 속명)은 글을 올립니다.
직접 덕스러운 용모를 찾아가 뵙지 못하고 감히 편지로 번거롭게 하여 매우 죄스럽게 생각하나이다. 주제넘고 경솔한 이 죄를 어찌 피할 길이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평소 저는 선생님을 태산처럼 존경하고 우러러 뵈었습니다. 이 때문에 망령되이 스스로 성명(姓名)으로써 통해서 간략하게나마 구구한 속마음을 바치오니, 헤아려 주실 수 있을런지요?
온 세상에 유학(儒學)이 점점 쇠퇴해 가고 있는 것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우리 동방(우리나라)은 멀리 기자(箕子)께서 개국하신 이후 팔조(八條)의 법칙을 세우고 백성을 가르쳐서 신라와 고려, 이조(李朝)에 이르기까지 좋은 풍속과 유풍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서양의 사조(思潮)가 날로 밀려오고 이설(異說, 기독교 학설)이 일어나서 선왕(先王, 공자)의 큰 가르침과 큰 법도가 거의 사라졌으니, 예부터 소중화(小中華, 작은 중국)라는 호칭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 이른바 선비라고 하는 자들은 반박하여 이단(異端)을 물리치지 못할 뿐 아니라, 덩달아 저들의 설을 주장하여 선왕(先王, 공자)의 가르침 위에 놓고 있고, 또 왕왕 천하의 대중들을 부추겨서 따르게 하고 있으니, 아/ 이것은 참으로 너무나도 불인(不仁)한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얼마 가지 못해서 이적(夷狄)이나 금수 같은 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선생께서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우뚝하셔서 우리가 종(宗, 유학)으로 삼는 바를 높이시고, 우리가 좋아하는 바(道學)를 좋아하시고, 후학들을 이끌고 가르치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하여 책을 짊어지고 공부하고자 찾아가는 선비들에게 텅 빈 상태로 가서 꽉 채워서 돌아오게 하지 않음이 없게 하시고, 또 도(道) 위하는 일을 자임하시어 이단을 배척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쳐서 이미 끊어진 도통(道統)의 추서(墜緖, 실마리)를 찾고, 잘못된 세상의 광란(狂亂)을 돌이키게 하시니, 외진 산골에 사는 무리들조차도 선생의 풍도(風度)를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사람들로 하여금 경모하게 함이 여기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택성(金鐸聲, 탄허스님)은 평소 미천한 가문의 서생(書生)으로 발걸음이 산골 밖을 벗어나지 못해서 널리 보고 배운 지혜가 없고 훈도(薰陶), 강습(講習)할 길도 없었습니다.
또 성색(聲色)에 현혹되고 겉모양에 흔들려서 아직도 감히 성인(공자)의 학문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새기고 골수에 사무쳐서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고인(古人)의 만분(萬分)의 일(一)은 됩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가르침을 듣기를 날마다 갈망하고 있으나 과연 어느 때쯤 그렇게 될 수 있을는지 망망하기만 합니다.
저를 돌아보건대 기질(氣質)이 유약(柔弱)하고 심지(心地)도 정립되지 못하여 스스로는 학문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오니, 오직 바라는 바는 선생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서 그 부족한 점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됨이 이와 같으니, 군자께서 더불어 말 할 만하겠습니까? 선생께서 저를 버리시지 않고 가르쳐 주신다면 저 택성(鐸聲)의 지극한 소원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유(癸酉, 1933) 소춘(小春, 10월의 이칭) 초 십일에 김택성(金鐸聲, 탄허스님 속명)은 재배(再拜)하노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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