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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조선]명산에는 명인! 전국 도사들의 살롱이 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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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0-08-27 12:49 조회3,5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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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에는 명인이 있어야 한다. 산은 있는데 사람이 없으면 흰구름과 새소리뿐이다. 고단자는 흰구름과 새소리만 듣고 있어도 자족하면서 살 수 있지만, 중간치기는 사람이 있어야 그 명산의 기운이 전해지고 산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자연의 진리를 인간들에게 전달해주기 위해서는 인물이 중간에 있어야 한다. 신라시대에 자장율사, 보천과 효명 왕자가 오대산에 있었다면 근래에는 한암선사와 탄허대사가 있었다. 한암(漢岩·1876~1951)이 누구인가? 선사(禪師)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한암은 한국 불교계에 선사의 모델 인격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격이 모델 인격이란 말인가? 깔끔함이 아닐까 싶다. 처신에서 깔끔하다. 이걸 유가에서는 출처관이라고 한다. 언제 들어가고 언제 나갈 것인가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물러서야 할 때 머뭇거리고 남아 있으면 볼썽사납다.
   
   한암은 50세 무렵인 1925년에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갔다. 앵무새 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동안 맡고 있었던 불교계의 벼슬을 모두 집어던졌다. 일본 사람들 눈치 보면서 ‘써준 원고나 읽을 수는 없다’는 심정이었지 않나 싶다. 학으로 남기 위해서 선택한 지점은 오대산이고, 상원사였다. 최후의 승부처로 선택한 장소가 상원사였다. 최후의 승부처란 자기가 죽을 자리라는 의미이다. 이 생각은 평소에 이미 해두었을 공산이 크다. ‘내가 마지막으로 어디 가서 수도하다가 죽어야겠다’고 생각해둔 지점을 가지고 있어야 수행자이다.
   
   
   천고의 학이 자취를 감춘 곳
   
   천고의 학이 자취를 감추기 위해서 오대산이 적당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대산이 그만큼 은둔하기에 좋은 산일까. 아니면 자신과 특별히 궁합이 맞는 산이라고 판단해서였을까. 한암선사는 1951년에 죽을 때까지 27년 동안 계속 오대산에서 살았으니, 그 일관성이 확인된다. 한암이 도력이 높은 고승이라는 사실은 일본인 고위관리들에게도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일본 관료들이 상원사에 찾아오곤 하였다. 한번은 고위관료가 상원사에서 차를 한잔 하게 되었다. 한암이 그 일본인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는데, 찻물이 찻잔에 넘치도록 따랐다. “아니 스님 이거 찻물이 넘치는데요?” “그대의 마음이 이미 꽉 차 있어서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넘치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총독부 고위관료 하나가 한암을 찾아와 물었다. “이번에 대동아전쟁에서 누가 이기겠습니까?” “덕이 있는 나라가 이길 겁니다!” 미국도 일본도 아닌 ‘덕이 있는 나라’는 꼬투리를 잡기 어려운 답변이었다. 일종의 선문답이기도 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에 한암의 제자로 있던 탄허는 전쟁을 예측하였다. 탄허는 ‘주역’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어서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었다. 탄허는 스승인 한암에게 상의를 드렸다. “스님 내년쯤에 전쟁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오대산을 떠나 남쪽으로 미리 피란을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오대산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너희들은 피란을 가거라.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선사에게로 가거라.” 탄허를 비롯한 한암의 제자들은 경남 양산의 통도사 극락암으로 전쟁 발발 전에 미리 피란을 갔다. 한암은 홀로 상원사에 머물렀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6·25가 터진 것이다. 인민군이 거처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국군 쪽에서 미리 소각시키는 바람에 전국의 많은 사찰이 잿더미로 변했다. 국군이 상원사 아래쪽에 있는 월정사를 소각하고 그 다음 상원사로 올라왔다. “스님 나오십시오. 여기도 소각해야 합니다” “나는 나갈 수 없소. 나도 같이 불에 태우시오.” 한암이 가사장삼을 갖춰 입고 산 채로 화장을 당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나타내자 불을 지르러 왔던 국군 장교는 차마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그래서 상원사 법당의 문짝만 몇 개 모아다 놓고 불을 질렀다. 문짝으로 땜빵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원사는 6·25 때 불에 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사람은 죽을 때 잘 죽어야 한다
   
   도인은 죽을 때 잘 죽어야 한다. 깔끔하게 미련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죽을 때 구질구질하면 평생 도 닦은 게 헛것이 된다. 도인의 신통력은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죽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한암은 1951년에 죽었다. 앉은 채로 그대로 죽었다. 불가에서 말하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이다. 좌탈했다는 것은 죽음의 순간에도 의식이 또렷했다는 증거이다. 죽어가는 자신을 또 하나의 의식이 바라보면서 죽는 것이다. 에고(ego)가 죽어가는 상태를 우주적 지성(cosmic intelligence)으로 바라보는 상태라고나 할까. 에고는 죽지만 불성, 즉 우주적 지성은 죽지 않는다. 오대산 상원사는 선사의 모델이자 대도인이었던 한암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도량이다. 어찌 신성한 도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대산 중대의 꼭대기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면 그 중간에 상원사가 있고, 그 아래쪽에 월정사가 있다. 상원사에 가보니 청룡·백호도 잘 감싸고 있지만 앞쪽에 포진한 안산이 가깝게 자리 잡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안산이 가까우면 그 영험한 기운이 속발하는 법이다. 상원사에서 수행해본 고단자의 경험담을 듣지 못해서 산세의 포진을 보고 그 영험함을 짐작할 뿐이다. 적어도 백 일 정도는 상원사 법당에 앉아서 수행을 해보아야만 그 터의 맛을 볼 수 있다.
   
   상원사 밑으로는 월정사가 있다. 월정사는 물이 좋다. 장마철에 월정사에 가 보니 절터를 감아 도는 계곡의 물소리가 귀를 씻어준다. 계곡물이 원형을 그리면서 월정사를 감아 돌아 흘러간다. 이 점이 참 아름답다. 우중월정(雨中月精)이라고 하더니만 역시 장마철에 오니 계곡 물소리의 진수를 들을 수 있었다. 물소리는 인간의 의식을 집중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잡념을 씻어준다. 물소리를 꿈속에서도 듣고 있는 상태가 되면 한 소식 깨친다고 한다.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되는 것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뭔가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인데, 이를 화두로 할 것이냐, 아니면 사업 아이템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누구를 증오하는 상태로 할 것이냐, 아니면 물소리에 집중할 것이냐이다. 물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부작용이 적다. 자연스럽게 집중이 된다. 그러려면 계곡 물소리가 자연적으로 잘 들리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런 장소가 흔하지는 않다. 월정사는 이 조건에 아주 부합하는 지점이다. 물이 절터를 거의 원형으로 감아 돌아가고 있다. 물속에 떠 있는 연꽃 같다. 이를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이라고도 부른다.
   
   6·25가 끝난 뒤에 탄허스님은 양산 통도사에 있다가 월정사로 되돌아왔다. 폐허가 된 월정사에 법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탄허는 출가 이전부터 이미 수재로 소문나 있었다. 유가의 사서삼경이 머릿속에 저장된 상태로 출가한 것이다. 한암선사를 그만큼 존경했기 때문이다. 탄허의 속가 아버지 김홍규는 원래 독립운동을 하던 인물이었다. 전북 김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 부자들의 자금을 지원받아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으로 전달해주는 일도 했다. 그러다가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을 만나게 되었다. 왜정 때 정읍 입암산 밑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민족종교 단체가 바로 보천교이다. 전라도는 물론이고 경상도 사람들도 집 팔고 논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정읍 입암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보천교와 차경석이 왜정 때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 차경석이 독립자금 전달하고 다니던 김홍규에게 도술 하나를 보여주었다고 전해진다. 김홍규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방 안에서 차경석이 김홍규에게 나무로 만든 2개의 목침을 공중에 띄워 놓고 공중에서 부딪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이를 본 김홍규는 곧바로 보천교에 들어갔다. ‘도력의 세계가 있는 것이구나!’ 차경석의 신봉자가 된 것이다. 뭔가 종교적 이적을 접해야만 독실한 신봉자가 되는 법이다.
   
   왜정 때 전국의 백만 명이 넘는 신도가 보낸 성금으로 정읍의 보천교 본부 건물이 세워졌다. 목조로 된 화려한 건물이었다. 보천교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이 본부 건물은 해체되어 옮겨졌다. 서울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 되었다. 보천교 차경석 밑에는 5명의 핵심 참모진이 포진하였다. 수·화·목·금·토 방향의 참모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중 있는 방향이 목 방향이었다. 김홍규는 목방주(木方主)가 되었다. 차경석 다음가는 2인자의 자리가 목방주였다. 독립운동가 김홍규는 민족종교 보천교의 목방주로 거듭난 셈이다. 그래서 탄허는 어렸을 때부터 보천교 본부 건물에서 놀면서 자랐다. 후일 불교로 출가한 그가 조계사 대웅전 기둥 옆에서 ‘이 건물이 내가 어렸을 때 놀던 건물인데!’ 하는 혼잣말을 자주 하였다. 민족종교에 몰입되었던 세대의 자식들은 대부분 나중에 좌익으로 빠졌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해야만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신흥종교로는 바꿀 수 없다. 괜히 신흥종교에 들어가서 재산 날렸다는 후회가 있었다. 그러나 목방주의 아들이었던 탄허는 자기 또래들이 사회주의로 빠져들었을 때 같이 가지 않고 불교로 들어왔던 것이다. 한암선사와의 인연이 결정적이었다.
   
   
   오대산파 중흥기 도래하나
   
   월정사에 머물렀던 탄허 때문에 오대산과 월정사는 전국 도사들의 살롱이 되기도 하였다. 불교의 화엄사상에 정통했던 고승이면서도 유교와 도교를 비롯한 음양오행 사상에 해박했던 탄허의 안목 덕분에 전국의 도사들이 월정사에 놀러왔다. 탄허는 이 도사들에게 후하게 대접하였다. 밥도 먹이고 여비도 챙겨주었다고 전해진다. 계룡산 정역파의 계승자로서 왜정 때 만주 일대를 방랑하면서 수많은 기인과 일합을 겨루기도 하고, 자연 풍광을 접하면서 풍류를 즐겼던 해운(海雲)이라는 인물이 대표적이다. 호걸풍이면서도 정역(正易)을 비롯한 동양사상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해운은 한번 월정사에 오면 한두 달씩 탄허스님과 겸상을 하였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탄허와 해운은 만나기만 하면 한 달이 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아마도 도사들의 기행담과 미래 세상의 운수 변화가 주된 테마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탄허가 남긴 예언, 즉 ‘일본열도는 물속에 가라앉게 된다. 후천개벽이 되면 여자가 상 위에 오른다. 한국이 세계적인 문화의 주도국이 된다’와 같은 예언들은 이 정역파들과의 교류에서 받은 영감일 수도 있다. 아무튼 불교계의 고승이면서도 유교와 도교에 해박하였기 때문에 오대산의 사상적 메뉴는 풍성하게 되었다. 자기 것만 최고이고 다른 것은 별거 없다고 천시하는 게 일반적인 풍조인 데 반해서 탄허의 월정사 가풍은 폭이 넓은 포용적 가풍을 지녔다. 자장율사 이래로 5만의 보살이 상주한다고 믿어온 오대산은 한암, 탄허를 거쳐서 근래에 운세가 열렸다. 평창올림픽이 열리면서 고속철이 오대산역을 통과한다. 청량리에서 1시간10분 남짓이다. 현재 주지인 정념(正念)스님은 탄허 이래로 호방한 가풍을 이어받아 월정사를 새롭게 확대하였다. 절 밑의 명상마을도 정념의 원력이다. 재가자들이 오대산의 정기를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오대산파의 중흥기가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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