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자장법사의 도력에 감화한 용왕이 내린 수마노석탑…보물에서 국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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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0-04-17 13:42 조회5,139회 댓글0건본문
“내가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 진골 출신이었던 자장법사(590~658)의 속명은 김선종량이다. 임금이 마침 공석이 된 태보(재상)에 그를 등용하려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임금이 “출사하지 않으면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자장법사는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임금은 어쩔 수 없이 법사의 출가를 허락했다. 636년(선덕여왕 5년) 자장법사는 당나라로 가서, 청량산의 문수보살상에 기도했다. 법사는 그곳에서 부처의 두골과 어금니, 불사리 100과와 가사 한 벌을 받았다.
자장법사는 643년(선덕여왕 17년) 부처의 진신사리를 들고 귀국했고, 가져온 불사리 100과는 통도사와 황룡사, 월정사, 태화사, 정암사 등에 나눠 봉안되었다고 한다.
이중 강원 정선의 정암사는 자장법사가 세운 월정사의 말사이다. “자장법사가 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산기슭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으나, 7일 동안이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묘범산(妙梵山)에서 정암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 ‘탑상·대산월정사오류성중조’조의 기사가 있다.
절의 창건 설화 중에는 칡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의 일화는 자장법사가 불사리탑을 세우려고 기도하다가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설상(雪上)으로 뻗어 멈춘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정암사 수마노탑(水瑪瑙塔)과 적멸보궁, 사찰터였다는 것이다. 이에 자장법사가 그 자리에 탑과 법당, 본당을 세웠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불상을 모시는 대신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법당을 일컫는다. 국내 5대 적멸보궁은 정암사 외에 통도사, 오대산 중대, 법흥사, 봉정암 등에 있다.
문화재청은 기존에 보물(제410호)로 지정되어 있던 정암사의 ‘수마노탑’을 오는 23일 국보로 승격지정하기로 17일 결정했다. 세 번째 도전 만에 국보 승격을 앞둔 수마노탑은 1964년 보물로 지정된 바 있다. ‘수마노탑’은 국내 현전하는 석탑 중에서도 성격, 위치, 재질, 형태 등 다양한 면에서 매우 독특한 사례로 평가된다. ‘수마노탑’은 불교에서 금·은과 함께 7보석 중의 하나인 마노(瑪瑙)와 관련이 있다.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자장의 도력에 감화하여 준 마노석으로 탑을 쌓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물길을 따라 가져왔다 해서 물 ‘水(수)’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으로 일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수마노탑은 총 길이가 9m에 달한다.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1층 탑신에 감실(龕室·작은 불상을 모신 곳)을 상징하는 문비(문짝)가 있고, 그 위로 정교하게 다듬은 모전(模塼·벽돌 형태로 다듬은) 석재를 포개어 쌓았다. 옥개석 위 낙수면과 아래 층급받침의 단 수를 층별로 일정하게 더해 쌓았다.
수마노탑은 국보 제30호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등 신라시대 이래 모전석탑에서 시작된 조형적인 안정감과 입체감 그리고 균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어 늦어도 고려 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1972년 수마노탑 해체 당시 탑의 건립 이유와 수리기록 등을 적은 탑지석이 발견됐다.
벽돌의 형태로 쌓은 석탑인 수마노탑은 석회암 지대라는 지역 특성을 반영하여 고회암(돌로마이트·탄산염 광물암의 퇴적암)으로 제작됐다. 쇠퇴한 산천의 기운을 복돋운다는 ‘산천비보(山川裨補) 사상’과 사리신앙을 배경으로 높은 암벽 위에 조성됐다. 경주 불국사 다보답(국보 제20호) 및 석가탑(국보 제21호) 등과 함께 탑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희소한 탑이다. 이천우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상근전문위원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과 함께 조성된 수마노탑은 불교사적인 측면에서 국보의 자격이 충분한 것으로 판단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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