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걷기 프로젝트] 평창 월정사 전나무숲길 <도깨비>도 홀딱 반한 바로 그곳
페이지 정보
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9-03-09 08:38 조회7,064회 댓글0건본문
“혼자 하고 싶은 거 다 하던 때가 가끔… 그리워….”
옆 테이블에서 툭 던져진 말이 데굴데굴 굴러 발밑에 닿자 갑자기 온갖 원성 섞인 욕지거리가 뒤따랐다.
“있는 게 더하다더니 솔로들 노는 데 와서 허세냐!”
“왜? 결혼하고 애까지 있으니 슬슬 딴 생각나서 그래? 오늘 어디 델다 주랴?”
슬쩍 보기에도 마흔 가까운 친구 네댓이 모여 젊은 시절엔 어땠느니, 누가 누굴 좋아했느니, 여자 여럿 울렸느니, 별의 별 얘기로 별나라를 만들고 있었다. 어찌나 목소리들이 쩌렁한지 굳이 귀를 세우지 않아도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사연들이 쏙쏙 들어와 안줏거리가 됐다.
“그러게. 늦장가 가서 아들까지 얻으니 좋긴 한데, 내가 없어진 것 같더라고.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 애보고 다시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 애보고. 이 생활이 2년째 아니냐. 하루라도 어디 조용한 데서 혼자 지내고 싶은 게 요즘 소원이다.
” 말이 끝나자마자 상욕에 비아냥이 오가더니 일순간 조용해졌다. 슬쩍 고개 돌려 훔쳐보니 말한 이나 듣던 이 모두 아래로 시선을 떨군 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먹다말고 일동 묵념이라니….
바로 앞에서 귀 쫑긋 세우고 주거니 받거니 술잔 돌리던 김 부장이 입을 열었다.
“저 친구들… 어리죠? 나이 마흔에 늦장가 간 놈이나 가지 못한 놈이나 혼자 조용한 데서 지내고 싶은 건 똑같으니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결혼한 놈은 말해 놓고 미안해서 조용하고 그러지 못한 놈은 난 뭐했나 싶어서 멍 때리고. 저러다 40대가 훌쩍 지나간다는 건 아마 모를 겁니다. 애가 뛰어다니면 언제 저런 생각했나 싶을 거예요. 아주 다이내믹하게 10년이 지나가버려요. 쉰 살 먹은 입장에서 한마디 하면 생각날 때 해버려야 후회가 없어요. 나이가 오십쯤 되면 일할 수 있고 애들 크는 거 보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그래서 가끔은 숨이 턱턱 막히거든요. 허허.”
읊조리듯 중얼대던 김 부장의 말을 들었는지, 옆 테이블 사내 중 하나가 말문을 열었다.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할 수도 없고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도 할 수 없으니 여행이라도 가야지.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손에 쥔 건 놓으면 안 되는 나이가 마흔이라던데, 하루 시간 내서 떠나자.”
강원도 평창으로 걸음을 옮긴 건 순전히 옆 테이블 남자의 마지막 한마디 때문이었다.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손에 쥔 건 놓칠 수 없는 나이라니. 곱씹을수록 일탈은 꿈도 못 꾸는 또 다른 질풍노도가 괜스레 측은하고 부끄러웠다. 이럴 땐 땀 흘려 일하는 일상 대신 잠시 고즈넉한 풍경 속을 걷는 게 약이다.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지 하나씩 되짚다보면 어느 새 늦춰졌던 고삐가 팽팽해진다.
▶드라마 <도깨비>의 슬픈 고백, 바로 그 장소
겨울의 월정사(月精寺)는 보고 듣고 걷기에 참 좋은 공간이다. 말 그대로 고즈넉하다. 그건 다분히 사찰 입구부터 펼쳐지는 전나무숲 덕분인데,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이라 쓰인 현판이 선명한 일주문(절의 입구임을 알리는 문)부터 약 900m의 길 양 옆에 전나무숲이 하늘을 가리고 섰다. 가는 길이 있으면 돌아 나오는 길이 있는 법, 월정사에서 다시 일주문까지 휘돌아오는 1㎞의 순환탐방로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피톤치드 맞으며 숨고르기에 이만한 둘레길이 없다. 그런 이유로 산을 찾는 이들은 이곳을 광릉 국립수목원, 변산반도 내소사와 함께 국내 3대 전나무숲으로 꼽는다. 워낙 이름이 알려진 이곳이 남녀노소 전 세대에 걸쳐 사랑받는 길이 된 건 TV드라마의 영향이 크다.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TV전파를 탔던 <도깨비>가 크게 한몫했다. 주인공 공유가 느릿하게 내뱉은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대사의 배경이 바로 이 월정사 전나무숲길이다. 드라마가 방영된 시기의 숲은 이전과 비교하면 인산인해였다. 일주문 주변 산채식당 주인의 말을 빌면 “평일이나 주말 모두 숲 곳곳에서 바로 그 장면을 패러디하느라 전나무숲길 전체에 도깨비가 득실댔다.”
이듬해 개최된 평창올림픽 무렵에는 글로벌한 도깨비들이 숲 곳곳에 출몰했다. 어떻게 드라마를 보고 익혔는지 눈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익숙한 장면이 연출됐다.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은 한산한 길이 됐지만 그럼에도 앞서가던 커플이 도깨비로 변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 됐다.
▶전나무 1800여 그루가 만드는 힐링공간
유모차나 휠체어로도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을 걷다보면 지방의 토속신을 모셔놓은 성황각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면 토속신 앞에 촛대와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그 옆엔 오가는 이들이 소원을 빌며 올린 작은 돌탑 무더기가 수북하다. 절 앞에 성황각이라니, 기도에 귀천이 어디 있느냐는 부처님의 배려일까. 좀 더 걷다보면 수령 300년은 족히 더된 아름드리 전나무가 떠억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섰다. 두 팔을 벌려 나무를 안으면 한아름은커녕 서너 번은 팔을 접고 펴야 둘레를 가늠할 수 있다.
나무를 안고 잠시 숨을 고르다보면 바람소리, 새소리가 청아하다. 알고 보니 이곳은 ‘노랑무늬붓꽃’과 ‘긴점박이올빼미’의 서식지다.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높은 산에서 살고 있는 노랑무늬붓꽃(Iris Odaesanensis)은 잎이 칼처럼 뾰족하다. 4월부터 6월까지 꽃을 피우는데 흰색에 노란 줄무늬가 있다. 오대산에서 처음 발견돼 학명에 오대산(Odaesan)이란 지명이 들어간다. 강원도 산악지대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긴점박이올빼미는 멸종위기의 희귀한 텃새다. 몸길이가 50㎝로 언뜻 올빼미와 비슷한데, 가슴이 세로줄무늬만 있는 게 다르다.
길이 시작되는 일주문에서 시선을 멀리두면 희미하게 잡히는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월정사 8각9층 석탑, 목조문수동자좌상 등의 문화재를 볼 수 있는데, 전쟁과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재건됐다.
월정사를 둘러 본 후 뒤로 난 산길로 들어서면 약 8㎞ 위에 상원사(上院寺)가 자리했다. 지금은 종각(鐘閣)만 남고 건물은 8·15 광복 후에 재건했는데,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호)이 남아있는 사찰이다.
걸어 오르기에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닌데,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차로 이동할 수 있다.(시간에 맞춰 버스도 다닌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상원사에 들러 굽이치는 오대산 산세를 감상하는 것도 또 하나의 힐링코스다.
오대산의 오대(五臺)란?
강원도 평창군, 강릉시, 홍천군 등 3개의 시와 군에 걸쳐있는 오대산은 11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총 22개)이다. 오대산은 자장율사가 공부하던 중국의 오대산과 비슷하다 해 오대산이 됐다고도 하고, 호령봉, 비로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5개 봉우리가 있다 하여, 혹은 동서남북에 5개의 암자가 있어 오대산이라 불리고 있다.
월정사 가는 길
·버스
-서울 동서울터미널→진부 시외버스터미널→월정사 정류장
-서울남부터미널→진부 시외버스터미널→월정사 정류장
· 기차
-청량리역→원주역→원주 시외버스터미널→진부 시외버스터미널→월정사
· KTX
-서울역, 청량리역→진부(오대산)역→월정사
· 자동차
-서울 중부고속도로→호법분기점→영동고속도로→진부IC→월정사
-서울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진부IC→월정사
[글 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2호 (2019년 3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