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사][상원사][정암사]만추(晩秋) 깊어간다…그대 어디로 가려는가(프레시안) 201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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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11-13 09:52 조회8,462회 댓글0건본문
만추(晩秋) 깊어간다…그대 어디로 가려는가
[국토학교 통신①] '5대 적멸보궁'의 청정산수 힐링투어
절집 스님들의 법문 설법은 어려운 쪽이 아니지만, 두고두고 새겨볼수록 어려운 깨우침을 얻게 되기도 한다. 고적하기조차 한 만추의 계절이다. 날씨가 차가와 갈수록 나무들은 자기가 누려왔고 가져왔던 모든 재산들을 모두 사라지게 한다. 그야말로 벌거숭이 나무의 맨몸으로만 버티어 내려고 하는데, 인간들은 어떠한가. 겹겹이 옷을 입고 또 껴입어 중무장의 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춥다 추워" 소리만 연발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나무로부터 배워야 할 지혜가 과연 어찌 되는지 곰곰 되새겨 볼 필요가 있으리라. 만추가 깊어갈수록 '적멸(寂滅)>의 산하(山河)'가 어떠한 '보궁(寶宮)'을 이루는지….
<적멸(寂滅)>은 스러지다, 사라지다 하는 뜻의 '적(寂)'과, 없어지다, 소멸되다 하는 뜻의 '멸(滅)'을 합한 말인데 원래 불교문자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석가모니)는 장차 임금이 될 왕자의 신분이었으련만 왕궁과 단란한 가정의 아내를 남겨둔 채 29세에 가출 아닌 출가를 하여 6년간 고행을 거듭한다. 마침내 35세의 나이로 성불하여 이어서 첫 법회를 열게 된다. 화엄경의 첫머리는 이때의 설법 내용에 관한 것으로 '적멸도량 법회'라고 부른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스러지게 하고 윤회의 악순환을 소멸시켜야 할 것에 관한 법회이기 때문이었다.
법정 스님은 <적멸>에 대해 '지극히 고요해서 맑고 투명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라야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 범속한 위인으로서는 도무지 아는 체할 나위가 없거니와 여기에서는 불성의 깨달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불교문화'에 관심을 가져온 문인으로서 관찰하게 되는 바에 대해 언급해 보고자 한다. <적멸>의 깨침에 관한 소식은 언제 어떻게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일까.
불교는 특히 신라에 전래될 적에 신선도, 국선도를 숭앙하는 천손족의 샤머니즘과 갈등 양상을 빚게 된다. 최남선의 설명대로 하자면 왕실불교(불보사찰, 호국사찰 조영)→귀족불교(이차돈의 죽음이 있게 된다)→민중불교(원효 의상의 방방곡곡 중생제도 행각 전개)의 3단계를 거쳐 나가게 된다. 불교에서는 불-법-승을 '3보(三寶)'라고 하거니와 신라에서도 불보사찰에 이어 법보사찰, 승보사찰이 순차적으로 조영된다. 이 중에서 맨 처음에 개창되는 불보사찰들에는 적멸보궁에 부처의 진신사리 불단을 모실지언정 불상을 봉안하지는 않는다. 부처 자신이 남긴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하는 유언을 받들어서이다.
불교미술사학자들에 따르면 이와 관련하여 인도의 <간다라미술>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대왕이 이 지역 일대를 '정복'한 이후로 그리스 미술과 조각상들이 전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도의 북서부(지금은 파키스탄 영토)에 놓인 간다라 지방은 고대의 남방 실크로드 중심권역으로, 그리스 조각상을 고스란히 빼닮은 초기의 불상들은 기원전 2세기에서 비롯되어 기원후 5세기에 이르기까지 조각 양식의 변화를 보이면서 크게 번창하는데, 이는 열렬한 불교주의자였던 아쇼카 왕의 불교 번성시대와 맞물린다. 곧 불단의 불보사찰에서 불상의 법보사찰로 이행되는 과정이라 한다. 시대가 흐를수록 법보사찰의 '대웅전'에는 더욱 세련된 미술 양식의 불상이 자리를 잡는다. 일반인으로서야 부처님 숭앙의 아이콘을 갖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우상숭배와는 다른 불심의 표상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문명사관을 피력했던 아놀드 토인비의 설명도 흥미로운 바가 있다. 그 당시로서는 선진문명이었던 그리스의 '문명'이 이태리-프랑스 등지를 거쳐 영국에 도착되는데 걸렸던 시간과 동쪽으로 아랍-인도 간다라-중국-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도착되는 데에 걸린 시간이 거의 엇비슷했다고 한다. 거리상으로는 영국보다 일본이 훨씬 더 먼 지역에 놓였으나 당시의 서유럽에는 야만족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문명 이동의 지체현상이 발생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정작 영국에 도착된 선진문물이라는 것은 식기류에 숟가락이라든가 물병 따위 생활비품 등속의 유입이었을 따름이라 한다. 반면에 동방 루트의 최종 도착지 일본에는 그리스 미술을 이어받은 세련된 불교미술과 불상들이 전래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급문화는 중국-한반도를 거치면서 중국문화와 고구려-백제-신라문화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더욱 겸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당시의 서구가 야만적이고 후진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동아시아는 이미 찬연한 유불선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고 하면서 '서구적인 가치'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실상 초라한 구성이었고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화는 먼 훗날에 이루어진 것이라 했다.
다른 한편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 시인 타고르가 1929년 3월 일본을 찾았을 적에 "일찍이 아시아의 등불이었던 코리아"를 노래한 것은 인도불교와 그에 수반되는 고대문화가 중국을 거처 일본에 당도하는 과정에서 '코리아'가 높은 수준의 문화-문명 전달 몫을 이룩하여 '빛나는 등불'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칭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영국식민지 인도보다 더 열악한 일본식민 상황에 처한 코리아를 새로운 시각으로 고무 찬양한 것이라 살필 수 있겠다. 이에 견주어볼 때 <오늘의 한류>가 과연 얼마나 수준 높은 문화 솔루션일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까닭도 있을 듯하다.
아무튼 한국불교는 처음으로 율사의 불보사찰들이 개창되기 시작한 이래로 법사의 법보사찰들이 잇따르고 뒤이어 선사의 승보사찰들이 조영되어 조화성과 다양성을 갖추게 된다. 양양 낙산사, 영주 부석사, 합천 해인사 등의 화엄종 교종 사찰, 그 다음 단계로는 교종 아니라 선사(禪師)들의 양양 진전사, 희양산 봉암사, 강릉 굴산사, 순천 송광사 등의 승보사찰이 이어진다. 그리고 나말여초 무렵부터는 불보사찰, 법보사찰을 선종사찰로 겸비하게 하거나 변형하는 사례도 나타나는데, 낙산사 등의 경우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나말여초 시대에 교종과 선종으로 양분되어 고려 중엽에 이르도록 갈등 양상을 빚다가 후대에 와서 선종불교의 조계종 종단이 형성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불교로서는 과거의 불보-법보-승보의 사찰 구분을 실제로는 별달리 괘념할 이유가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의 산사 참배자들이 구태여 사찰의 원적이나 족보를 알아야 할 부담도 덜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불-법-승의 어느 사찰이든 장엄과 광명을 거리낌 없이 뽐내고 있음을 심호흡할 수 있게 하는 늦가을철의 산사 경관. <마음 비우기의 향기>를 누려볼 수 있을 터이니 오늘의 유행어대로 <힐링투어의 명소>가 되고도 남는다(불교신자만 아니라 일반인들 또한 어린이들을 동반하여 어째서 꾸역꾸역 찾아드는지…이 시대 시민들의 '녹색 배고픔'이 얼마나 우심한 것인지, 고승 명승만 아니라 재가승의 불교인들도 새롭게 알아주시고 살펴주시기를!).
어디어디 명산대천의 어느 어느 골짝 불교산수 비경이어야 할까. 갈 곳은 많고 다양하나 내 재량의 산사 탐방 테마기행은 여유로운 쪽만은 아니지 않을까. 나로서는 특히 불보사찰들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문득 불교 시대구분론을 상기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와 제자들이 이룩한 근본불교의 정법시대, 여러 부파불교로 확장되어 가는 상법(象法)시대, 그리고 말세의 징후를 보이게 되는 말법시대로 이어진다고 한다. 후대로 갈수록 원시불교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소리가 높아지게 되지만 구체적으로 어찌 실현해야 하는 것인지 '말법시대의 상황'에서는 아리송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붓다가 최초 설법한 '적멸도량'은 <화엄경> 등의 기록을 통해 어떠한 신성공간 구성이었던 것인지 유추해볼 수 있는데 오늘에도 불보사찰의 본당은 '대웅전' 아니라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을 내세우게 되어 있다. 부처 정법시대에 최초 설법이 이루어졌던 '적멸도량'을 이어받기 위하여 조영한 사찰인 까닭이다. 후대 건축의 대웅전이 '전각'인데 대해 보다 격을 높여서 '궁'이라 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러한 불단 사원의 '적멸보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는 못하는 듯한데 되묻고 싶은 바가 있다.
적멸이 어찌하여 '보궁(寶宮)'이라는 것인지…, 서양과는 달리 동양의 예제건축(禮制建築) 전통은 사찰이나 서원 등의 종교건축에 '호화궁전'을 차려 놓게 하는 것을 꺼렸던 바이지만, '적멸의 보궁'은 특히나 늦가을 철에 '불교산수'의 문화원형을 심호흡하게 한다.
오늘에 이르도록 국토의 적멸보궁 사원들은 나름대로 특색을 지니어 이 땅 산하의 향기를 품어안고 있음에 틀림없다. 특히 <5대 적멸보궁>을 꼽고 있는데 이러한 사찰들의 연속되는 순례 순력 기행은 어쩌면 '천로역정(天路歷程)'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경남 양산 통도사,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상원사,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이다. 산사로(山寺路)의 매혹이 대단한 통도사를 예외로 놓는다면 강원도 산간 오지와 고지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으니 교통 불편의 시대로 거스를수록 더욱 보물 광맥 간직 간수의 보배 궁전이었을 터.
오늘에도 보배 궁전임에는 틀림없는데 산업경제 환경디자인이 이러한 청정산수를 방관하고 있음은 다행일까, 예비 경계령을 발동해야 하는 단계일 것일까. 비주류경제학자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저술에서 <불교경제학>을 예찬하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근검절약의 경제학이고, 자연-자원 과소비의 부자경제와는 다른 빈자들의 <가난경제학>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부영양화(富營養化)현상'이라는 오염 공해 측량 용어를 상기하게 되는데 불보사찰 청정산수는 아예 해당될 수 없어야 한다.
5대 적멸보궁 불보사찰이 멀리 멀리 산재하고 있으니 이에 다시 묻게 된다. 어디어디 명산대천의 어느 어느 골짝의 적멸보궁 비경을 찾아야 할지…. 나로서는 똑 부러지게 특정 산사를 지목해 볼 수만은 없는데 환기해야 할 바가 있기는 하다.
국토기행은 오늘에 특히 풍부한 감수성 발휘의 개인적 사유언어로 작성되는 경향을 보인다. 생태환경파괴에다가 경제우선의 인간성 황폐화 현상에 내몰린 시민들의 해방구 탈출 욕구에 발맞추기 위해서이겠으나 이를 공유언어로 어찌 공유할 수 있게 하나. 5대 적멸보궁에 대한 로드다큐 비망록을 간추려 본다.
우선 불교산수가 호젓하면서도 아름드리 수림에 둘러싸인 경관이 빼어난 쪽으로는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의 법흥사를 꼽아보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보궁'을 발견한 것이 1961년 여름철이었다. <고민의 운동장>이어야 하는 캠퍼스에 되레 고민이 부족하다는 청춘언어로 대학 자퇴를 결행하려던 무전여행 방랑기에 우연히 들러보게 된 곳이었다. 나름대로 싯다르타의 청춘 고뇌의 크기와 높이 그리고 깊이를 새겨보게 했다.
수려하다기보다는 수줍어하는 듯한 정선 태백산 정암사의 청정 공간은 특히 나에게는 1980년 짧았던 봄에 '신군부'의 사북 탄광 농성사건 진압 상황에 관한 현장 르포문학 답사와 관련하여 그 영상이 오버랩 된다. '국파산하재' 탄식의 두보와는 달리 '국재산하재'를 숙의하던 광부들과 스님의 선문답이 지금껏 눈앞에 떠오른다.
설악산 능선 산상에서 더욱 우뚝하게 청정국토 지키는 봉정암은 1964년 늦가을에 백담사 코스를 경유하여 힘겹게 올랐는데 당시의 산행 메모에는 <느낌의 절벽>이라고 적어놓았다는 것을 후일에 확인했다. 말이 필요 없는 경관에서는 느낌표의 감탄사도 닫아놓아야 한다.
현대 고승석덕 열전에 포함되는 방한암, 탄허, 법정 스님 등이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던 오대산 상원사…, 이 사원의 기행문은 함부로 작성되지는 말아야 하는데, 공연한 소리로 잡음 넣지 말고 석덕들의 큰 깨우침 법음을 무형문화유산으로 상속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어찌할 바 없이 감탄사를 붙인다. 사원 마다마다 만추의 황홀 이루어 만산홍엽들의 생명해방으로 보궁 열반을 누리도록 하고 있도다. 사람세상에서 이러한 식물나라로 모름지기 아웃도어의 행차를 해보고 싶구나.
신라 말기 시대에 최치원이 읊은 시 한편을 새롭게 읽어본다.
일만 골짜기에는 우레 소리 울리고 일천 봉우리에는 비 맞은 초록 새롭구나.
산승(山僧)은 세월을 잊고 다만 나뭇잎으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네.
(萬壑雷聲地 千峯雨色新 山僧忘歲月 唯記葉間者)
세월을 잊고 '다만 나뭇잎으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여의도 증권가의 시세차익이라든가 강남 백화점의 최신 유행 따져 시가 차익을 매기는 속세의 시간계산법과는 엄청 다르다. 탈속 산문(山門)의 코스몰로지 4차원 세계, 그 우주성 해방공간 심호흡하기…, 백문불여일견이다. 기껏 찾아가 한껏 소요하여 마음껏 향기로워지리니….
박태순(소설가·국토학교 교장)
필자 박태순 씨는 1964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소설집으로 <무너진 극장> <정든 땅 언덕 위>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 <소설 원효대사> 등이 있고 국토기행문집으로 <작가기행> <국토와 민중> <나의 국토 나의 산하>(전3권)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신동엽창작기금, 요산문학상, 한국일보 출판상 저작상, 단재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문학습원 국토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적멸(寂滅)>은 스러지다, 사라지다 하는 뜻의 '적(寂)'과, 없어지다, 소멸되다 하는 뜻의 '멸(滅)'을 합한 말인데 원래 불교문자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석가모니)는 장차 임금이 될 왕자의 신분이었으련만 왕궁과 단란한 가정의 아내를 남겨둔 채 29세에 가출 아닌 출가를 하여 6년간 고행을 거듭한다. 마침내 35세의 나이로 성불하여 이어서 첫 법회를 열게 된다. 화엄경의 첫머리는 이때의 설법 내용에 관한 것으로 '적멸도량 법회'라고 부른다.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스러지게 하고 윤회의 악순환을 소멸시켜야 할 것에 관한 법회이기 때문이었다.
▲ 운무에 싸인 사자산 법흥사. 싯다르타 청춘고뇌의 크기와 높이, 깊이를 새겨보게 한다. Ⓒ법흥사 |
법정 스님은 <적멸>에 대해 '지극히 고요해서 맑고 투명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라야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 범속한 위인으로서는 도무지 아는 체할 나위가 없거니와 여기에서는 불성의 깨달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불교문화'에 관심을 가져온 문인으로서 관찰하게 되는 바에 대해 언급해 보고자 한다. <적멸>의 깨침에 관한 소식은 언제 어떻게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일까.
불교는 특히 신라에 전래될 적에 신선도, 국선도를 숭앙하는 천손족의 샤머니즘과 갈등 양상을 빚게 된다. 최남선의 설명대로 하자면 왕실불교(불보사찰, 호국사찰 조영)→귀족불교(이차돈의 죽음이 있게 된다)→민중불교(원효 의상의 방방곡곡 중생제도 행각 전개)의 3단계를 거쳐 나가게 된다. 불교에서는 불-법-승을 '3보(三寶)'라고 하거니와 신라에서도 불보사찰에 이어 법보사찰, 승보사찰이 순차적으로 조영된다. 이 중에서 맨 처음에 개창되는 불보사찰들에는 적멸보궁에 부처의 진신사리 불단을 모실지언정 불상을 봉안하지는 않는다. 부처 자신이 남긴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하는 유언을 받들어서이다.
불교미술사학자들에 따르면 이와 관련하여 인도의 <간다라미술>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대왕이 이 지역 일대를 '정복'한 이후로 그리스 미술과 조각상들이 전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도의 북서부(지금은 파키스탄 영토)에 놓인 간다라 지방은 고대의 남방 실크로드 중심권역으로, 그리스 조각상을 고스란히 빼닮은 초기의 불상들은 기원전 2세기에서 비롯되어 기원후 5세기에 이르기까지 조각 양식의 변화를 보이면서 크게 번창하는데, 이는 열렬한 불교주의자였던 아쇼카 왕의 불교 번성시대와 맞물린다. 곧 불단의 불보사찰에서 불상의 법보사찰로 이행되는 과정이라 한다. 시대가 흐를수록 법보사찰의 '대웅전'에는 더욱 세련된 미술 양식의 불상이 자리를 잡는다. 일반인으로서야 부처님 숭앙의 아이콘을 갖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우상숭배와는 다른 불심의 표상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늦가을 설악산 봉정암. 말이 필요없는, 느낌표의 감탄사도 닫아놓아야 하는, <느낌의 절벽> 같은 곳. Ⓒ김욱 |
'도전과 응전'이라는 문명사관을 피력했던 아놀드 토인비의 설명도 흥미로운 바가 있다. 그 당시로서는 선진문명이었던 그리스의 '문명'이 이태리-프랑스 등지를 거쳐 영국에 도착되는데 걸렸던 시간과 동쪽으로 아랍-인도 간다라-중국-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도착되는 데에 걸린 시간이 거의 엇비슷했다고 한다. 거리상으로는 영국보다 일본이 훨씬 더 먼 지역에 놓였으나 당시의 서유럽에는 야만족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문명 이동의 지체현상이 발생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정작 영국에 도착된 선진문물이라는 것은 식기류에 숟가락이라든가 물병 따위 생활비품 등속의 유입이었을 따름이라 한다. 반면에 동방 루트의 최종 도착지 일본에는 그리스 미술을 이어받은 세련된 불교미술과 불상들이 전래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급문화는 중국-한반도를 거치면서 중국문화와 고구려-백제-신라문화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더욱 겸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당시의 서구가 야만적이고 후진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동아시아는 이미 찬연한 유불선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고 하면서 '서구적인 가치'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실상 초라한 구성이었고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화는 먼 훗날에 이루어진 것이라 했다.
▲ 오대산 상원사의 동틀 무렵. 이 사찰의 기행문은 함부로 작성되지는 말아야 한다. Ⓒ상원사 |
다른 한편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 시인 타고르가 1929년 3월 일본을 찾았을 적에 "일찍이 아시아의 등불이었던 코리아"를 노래한 것은 인도불교와 그에 수반되는 고대문화가 중국을 거처 일본에 당도하는 과정에서 '코리아'가 높은 수준의 문화-문명 전달 몫을 이룩하여 '빛나는 등불'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칭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영국식민지 인도보다 더 열악한 일본식민 상황에 처한 코리아를 새로운 시각으로 고무 찬양한 것이라 살필 수 있겠다. 이에 견주어볼 때 <오늘의 한류>가 과연 얼마나 수준 높은 문화 솔루션일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까닭도 있을 듯하다.
아무튼 한국불교는 처음으로 율사의 불보사찰들이 개창되기 시작한 이래로 법사의 법보사찰들이 잇따르고 뒤이어 선사의 승보사찰들이 조영되어 조화성과 다양성을 갖추게 된다. 양양 낙산사, 영주 부석사, 합천 해인사 등의 화엄종 교종 사찰, 그 다음 단계로는 교종 아니라 선사(禪師)들의 양양 진전사, 희양산 봉암사, 강릉 굴산사, 순천 송광사 등의 승보사찰이 이어진다. 그리고 나말여초 무렵부터는 불보사찰, 법보사찰을 선종사찰로 겸비하게 하거나 변형하는 사례도 나타나는데, 낙산사 등의 경우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나말여초 시대에 교종과 선종으로 양분되어 고려 중엽에 이르도록 갈등 양상을 빚다가 후대에 와서 선종불교의 조계종 종단이 형성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불교로서는 과거의 불보-법보-승보의 사찰 구분을 실제로는 별달리 괘념할 이유가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의 산사 참배자들이 구태여 사찰의 원적이나 족보를 알아야 할 부담도 덜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수줍어하는 듯한 태백산 정암사의 저녁예불 무렵 Ⓒ정암사 |
불-법-승의 어느 사찰이든 장엄과 광명을 거리낌 없이 뽐내고 있음을 심호흡할 수 있게 하는 늦가을철의 산사 경관. <마음 비우기의 향기>를 누려볼 수 있을 터이니 오늘의 유행어대로 <힐링투어의 명소>가 되고도 남는다(불교신자만 아니라 일반인들 또한 어린이들을 동반하여 어째서 꾸역꾸역 찾아드는지…이 시대 시민들의 '녹색 배고픔'이 얼마나 우심한 것인지, 고승 명승만 아니라 재가승의 불교인들도 새롭게 알아주시고 살펴주시기를!).
어디어디 명산대천의 어느 어느 골짝 불교산수 비경이어야 할까. 갈 곳은 많고 다양하나 내 재량의 산사 탐방 테마기행은 여유로운 쪽만은 아니지 않을까. 나로서는 특히 불보사찰들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문득 불교 시대구분론을 상기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와 제자들이 이룩한 근본불교의 정법시대, 여러 부파불교로 확장되어 가는 상법(象法)시대, 그리고 말세의 징후를 보이게 되는 말법시대로 이어진다고 한다. 후대로 갈수록 원시불교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소리가 높아지게 되지만 구체적으로 어찌 실현해야 하는 것인지 '말법시대의 상황'에서는 아리송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붓다가 최초 설법한 '적멸도량'은 <화엄경> 등의 기록을 통해 어떠한 신성공간 구성이었던 것인지 유추해볼 수 있는데 오늘에도 불보사찰의 본당은 '대웅전' 아니라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을 내세우게 되어 있다. 부처 정법시대에 최초 설법이 이루어졌던 '적멸도량'을 이어받기 위하여 조영한 사찰인 까닭이다. 후대 건축의 대웅전이 '전각'인데 대해 보다 격을 높여서 '궁'이라 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러한 불단 사원의 '적멸보궁'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는 못하는 듯한데 되묻고 싶은 바가 있다.
적멸이 어찌하여 '보궁(寶宮)'이라는 것인지…, 서양과는 달리 동양의 예제건축(禮制建築) 전통은 사찰이나 서원 등의 종교건축에 '호화궁전'을 차려 놓게 하는 것을 꺼렸던 바이지만, '적멸의 보궁'은 특히나 늦가을 철에 '불교산수'의 문화원형을 심호흡하게 한다.
오늘에 이르도록 국토의 적멸보궁 사원들은 나름대로 특색을 지니어 이 땅 산하의 향기를 품어안고 있음에 틀림없다. 특히 <5대 적멸보궁>을 꼽고 있는데 이러한 사찰들의 연속되는 순례 순력 기행은 어쩌면 '천로역정(天路歷程)'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경남 양산 통도사,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상원사,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이다. 산사로(山寺路)의 매혹이 대단한 통도사를 예외로 놓는다면 강원도 산간 오지와 고지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으니 교통 불편의 시대로 거스를수록 더욱 보물 광맥 간직 간수의 보배 궁전이었을 터.
오늘에도 보배 궁전임에는 틀림없는데 산업경제 환경디자인이 이러한 청정산수를 방관하고 있음은 다행일까, 예비 경계령을 발동해야 하는 단계일 것일까. 비주류경제학자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저술에서 <불교경제학>을 예찬하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근검절약의 경제학이고, 자연-자원 과소비의 부자경제와는 다른 빈자들의 <가난경제학>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부영양화(富營養化)현상'이라는 오염 공해 측량 용어를 상기하게 되는데 불보사찰 청정산수는 아예 해당될 수 없어야 한다.
▲ 산사로(山寺路)의 매혹이 대단한, 만추의 양산 통도사 Ⓒ통도사 |
5대 적멸보궁 불보사찰이 멀리 멀리 산재하고 있으니 이에 다시 묻게 된다. 어디어디 명산대천의 어느 어느 골짝의 적멸보궁 비경을 찾아야 할지…. 나로서는 똑 부러지게 특정 산사를 지목해 볼 수만은 없는데 환기해야 할 바가 있기는 하다.
국토기행은 오늘에 특히 풍부한 감수성 발휘의 개인적 사유언어로 작성되는 경향을 보인다. 생태환경파괴에다가 경제우선의 인간성 황폐화 현상에 내몰린 시민들의 해방구 탈출 욕구에 발맞추기 위해서이겠으나 이를 공유언어로 어찌 공유할 수 있게 하나. 5대 적멸보궁에 대한 로드다큐 비망록을 간추려 본다.
▲ 김억 작 정암사 Ⓒ김억 |
우선 불교산수가 호젓하면서도 아름드리 수림에 둘러싸인 경관이 빼어난 쪽으로는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의 법흥사를 꼽아보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보궁'을 발견한 것이 1961년 여름철이었다. <고민의 운동장>이어야 하는 캠퍼스에 되레 고민이 부족하다는 청춘언어로 대학 자퇴를 결행하려던 무전여행 방랑기에 우연히 들러보게 된 곳이었다. 나름대로 싯다르타의 청춘 고뇌의 크기와 높이 그리고 깊이를 새겨보게 했다.
수려하다기보다는 수줍어하는 듯한 정선 태백산 정암사의 청정 공간은 특히 나에게는 1980년 짧았던 봄에 '신군부'의 사북 탄광 농성사건 진압 상황에 관한 현장 르포문학 답사와 관련하여 그 영상이 오버랩 된다. '국파산하재' 탄식의 두보와는 달리 '국재산하재'를 숙의하던 광부들과 스님의 선문답이 지금껏 눈앞에 떠오른다.
설악산 능선 산상에서 더욱 우뚝하게 청정국토 지키는 봉정암은 1964년 늦가을에 백담사 코스를 경유하여 힘겹게 올랐는데 당시의 산행 메모에는 <느낌의 절벽>이라고 적어놓았다는 것을 후일에 확인했다. 말이 필요 없는 경관에서는 느낌표의 감탄사도 닫아놓아야 한다.
현대 고승석덕 열전에 포함되는 방한암, 탄허, 법정 스님 등이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던 오대산 상원사…, 이 사원의 기행문은 함부로 작성되지는 말아야 하는데, 공연한 소리로 잡음 넣지 말고 석덕들의 큰 깨우침 법음을 무형문화유산으로 상속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어찌할 바 없이 감탄사를 붙인다. 사원 마다마다 만추의 황홀 이루어 만산홍엽들의 생명해방으로 보궁 열반을 누리도록 하고 있도다. 사람세상에서 이러한 식물나라로 모름지기 아웃도어의 행차를 해보고 싶구나.
▲이종구 작 정암사 Ⓒ이종구 |
신라 말기 시대에 최치원이 읊은 시 한편을 새롭게 읽어본다.
일만 골짜기에는 우레 소리 울리고 일천 봉우리에는 비 맞은 초록 새롭구나.
산승(山僧)은 세월을 잊고 다만 나뭇잎으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네.
(萬壑雷聲地 千峯雨色新 山僧忘歲月 唯記葉間者)
세월을 잊고 '다만 나뭇잎으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여의도 증권가의 시세차익이라든가 강남 백화점의 최신 유행 따져 시가 차익을 매기는 속세의 시간계산법과는 엄청 다르다. 탈속 산문(山門)의 코스몰로지 4차원 세계, 그 우주성 해방공간 심호흡하기…, 백문불여일견이다. 기껏 찾아가 한껏 소요하여 마음껏 향기로워지리니….
박태순(소설가·국토학교 교장)
필자 박태순 씨는 1964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소설집으로 <무너진 극장> <정든 땅 언덕 위>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 <소설 원효대사> 등이 있고 국토기행문집으로 <작가기행> <국토와 민중> <나의 국토 나의 산하>(전3권)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신동엽창작기금, 요산문학상, 한국일보 출판상 저작상, 단재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문학습원 국토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박태순 국토학교 교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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