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화사 산내암자인 두타산 관음암] (법보신문) 201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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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6-27 13:12 조회9,309회 댓글0건본문
- 31. 두타산 관음암
- 잠든 금빛 신심이 무릉계곡 안개 속 관음 품에 안기다
민심 다독이려는 왕건의 불사
관음암 중건하는 계기 돼
약초로 노모 모시던 심씨 총각
백일관음기도 영험담 유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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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는 굳이 필요 없었다. 무릉계곡 따라 두타산을 오르는 길옆에 놓인 큰 바위 위에 돌탑이면 충분했다. 동해 제일 관음기도도량이라는 말을 확인하려는 발걸음은 그걸로 족했다.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돌탑, 아니 층층이 겹쳐진 신심만 따라가도 기도도량은 제 모습을 보인다. 혹 아침예불 시간이라면 목탁과 염불소리가 길잡이를 하곤 했다. 그래도 두타산은 친절했다. 삼화사를 나와 오른쪽으로 걸어 올라가다 만난 갈림길에서 ‘관음기도 영험도량 관음암’이란 이정표를 만났다.
예서 1.1km 가파른 길을 올라야 했다. 쏟아지는 땀과 턱까지 찬 숨에 번뇌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잡생각은 간혹 이는 바람과 무릉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삼켰다. 50분을 오르니 작은 철제 계단과 마주했다. 기묘한 나무 조각위에 돌탑 2개 뒤에 조성한지 얼마 안 돼 보이는 7층 석탑이 아련했다. 관음암(주지 효림 스님)이다.
조계종 4교구본사 월정사 말사 삼화사의 산내암자인 관음암은 지조암(指祖庵)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설명에 따르면 ‘관음암중건모연기’엔 고려 태조 1년인 918년에 용비(龍飛)대사가 창건해 오랫동안 지조암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있단다. 그런데 잘못된 해석이란 지적도 적지 않다고. 용비는 임금이 등극하는 일을 뜻해서다. 용비라는 말이 등장했으니, 관음암이 창건 때부터 왕실의 주목을 받았다는 정도로 미루어 짐작해봄직 하다. 해서 태조 4년, 즉 921년 창건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왕실 지원으로 중건도 됐다고 한다. 태조 왕건 즉위 20년인 934년, 통일 전쟁으로 수많은 살생을 저질렀던 왕은 민심을 다독이고자 했다. 신라시대 고찰 삼공암(三公庵)을 삼화사(三和寺)로 바꾸고 노비와 밭을 하사했다. 후삼국을 통일했다지만 서로 칼을 겨눴던 마음은 쉽게 치유할 수 없었을 게다. 그리고 죽어간 생명붙이들의 원망을 어찌 다 달래랴. “셋이 조화를 이룬다”는 ‘삼화(三和)’라는 말에 왕건의 깊은 참회와 백성의 안녕을 담았으리라. 삼화사는 날로 번창해 8개 암자를 뒀고, 이 때 관음암이 중건됐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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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암은 부침을 겪었다. 조선 정조 17년인 1793년 화마로 소실된 암자를 당시 삼척부사였던 윤청의 주선으로 재건했으나,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때 연기와 함께 잿더미가 됐다. 1959년인지 1956년인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다시 중건되면서 관음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작은 암자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이 중생을 자비로 품었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수많은 이들이 관음암에 걸음해서다.
전설(?) 같은 심씨 총각 이야기가 여기서 탄생했다. 삼화사 아랫마을에 살던 심씨는 늙고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용모가 수려하고 마음씨도 고왔으나 서른이 다 되도록 배필이 없었다. 그는 두타산에서 약초를 깨다 장에다 내다 팔면서 어머니와 끼니를 잇고 있었다. 약초 깨러 갈 때면 늘 산중 암자를 지나다녔다. 그럴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기도드리는 스님의 염불소리를 듣곤 했다. 매일 같이 이곳을 지나다니다보니 그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염불을 조금씩 흉내 냈다. 한참 약초를 캐다가도 목탁소리가 들리면 장단 맞추듯 나지막이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어머니 병세를 걱정하던 그가 하루는 스님에게 불쑥 물음을 던졌다. “스님, 관세음보살한테 기도하면 정말 소원이 이뤄지나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스님이 이렇게 답했다. “그대가 100일 동안 지성으로 기도해도 소원 성취가 안 되면 소승이 이뤄 드리지요.” 원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굳은 발심과 꼭 이뤄진다는 단단한 믿음, 그리고 신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삼갔다. 스님은 ‘지성으로’라는 말과 눈빛에 담아 그에게 전했으리라. 다음날부터 그는 산으로 가는 길과 집에 가는 길에 꼬박꼬박 관세음보살 앞에 마음을 바쳤다. 그는 세 번 절을 올리고 이렇게 빌고 또 빌었다. “속히 어머니 건강이 좋아지시고, 저도 예쁜 색시 얻어 장가가고 싶습니다.” 그냥 빌진 않았다. 산나물도 올리고 싸갔던 점심을 공양하기도 했다. 그렇게 100일이 다 돼 되도록 관세음보살을 마주하니 낯설지가 않았다. 하루는 약초 캐러 가는 길에 비를 만났다. 그는 법당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다 시간이나 달랠 요량으로 맨땅에 고누판을 그려놓고 고누놀이를 했다. 땅에 선을 그어놓고 장기마냥 한 칸씩 돌을 움직여 상대방 돌이 못 움직이게 만들면 이기는 놀이였다.
혼자 놀기는 심심했다. 문득 관세음보살이 바라봤다. 웃을락 말락 하는 미소를 보고 그가 말을 건넸다. “관세음보살님, 저하고 고누 한 판 해요.” 대답이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는 내기까지 걸었다. “제가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시고, 관세음보살님이 이기면 제가 소원을 들어드릴게요. 일단 제 소원은 예쁜 색시랑 사는 겁니다.” 그는 혼자 맞장구치며 돌을 이리저리 옮겼다. 처음엔 이겼고, 다음 판은 졌다. 삼세판. 그는 마지막 판이 수세에 몰리자 한 수 물려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관세음보살은 말없이 웃음만 보냈다. 그는 재빨리 법당으로 들어가 세 번 절하고 말했다. “절값으로 한 수 물릴게요.” 그러자 마지막은 그가 이겼다. “제 소원 아시죠? 들어주세요.” 그는 비가 물러나자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변변한 삭도 하나 없어
공양물 직접 들고가야
낡은 법당에 기도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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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하얀 옷을 입은 귀부인이 꿈에 찾아왔다. “지조암 관세음보살입니다. 제가 고누에 졌으니 약속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장에 가서 약초를 팔면 한 처녀가 약을 구하러 올겝니다. 약을 팔면 필시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과연 꿈대로 처녀가 약초를 구하러 나타났다. 처녀는 막무가내로 외상으로 약을 달라고 했고, 그는 처음 본 사람이었으나 위중한 아버지를 위해 어떻게든 약초를 구하려는 처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대신, 아버지가 낫거든 반드시 약값을 갚는 조건으로. 며칠이 지나자 문밖에 인기척이 났다. 그가 밖으로 나가보니 장에서 만났던 처녀와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약값을 치르러 온 게다. 그는 용기를 내 대뜸 “따님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노인은 그를 사위로 맞았다. 첫날 밤, 그는 아내에게 지조암 관세음보살 얘기와 꿈을 털어놨다. 그러자 아내도 비슷한 말을 꺼냈다. “저도 지조암 관세음보살님에게 아버지 병을 낫게 해달라고 100일 기도를 했어요. 회향하던 날 꿈에 한 귀부인이 장에 가보라고 해서 나갔던 거예요.” 부부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날이 밝자 부부는 절을 찾아 관세음보살의 상호를 살폈다. 꿈 속 귀부인이었다. 부부는 수차례 절을 올리며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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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탓일까. 현충일이던 6월6일 관음암에는 기도객 발길이 이어졌다. 관음암 편액을 단 인법당은 세월의 때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법당 바깥 곳곳에 칠이 벗겨졌고 법당 바닥은 울었고 테이프를 사용한 벽지는 간신히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절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100년 가까이 된 인법당이 기도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우소는 날아간 기와가 창피한 듯 모자 삼아 파란 천막을 뒤집어썼고, 종무소 겸 공양간으로 쓰는 곳도 결이 많이 상했다.
그럼에도 기도를 올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한 보살님은 향을 피우고 108배를 올렸다. 3배하고 좌복에 눌러 앉은 신심이 부끄러워 자리를 비켰다. 바깥으로 나오니 활짝 열린 법당 문 안으로 금빛미소를 머금은 관세음보살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돌려 법당 오른쪽을 보니 돌계단이 정겹다. 밟아 올라가니 독성과 칠성, 산신을 함께 모신 작은 법당 그리고 돌에 새긴 산왕대신이 나란히 앉았다.
“산왕대신은 10년 전 주지 효림 스님이 열심히 기도해 불사했다”고 기도소임을 보고 있는 홍인 스님이 귀띔했다. 1000년 뒤에도 찾아올 기도객들을 위한 불사란다. 스님에게 우문을 던졌다. 기도를 물었다. 현답이 돌아왔다. “마음 닦아 부처님 지혜로 올라가기 위한 돌계단이지요.” 곁에 있던 무량심(60), 수덕신(59) 보살이 말을 보탰다. 한 마디로 꾸준함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관음암을 다녔던 이들은 틈만 나면 이곳에 온다고. 그네들은 공양물을 지고 온다. 수덕신 보살은 가스통이며 향초를 어깨에 들쳐 메고 관음암을 오른다. 변변한 삭도도 없어 기도객들이 이고 지고 공양물을 날라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상황이 오히려 고맙다. “업 닦는 거예요.”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를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수도 없이 관음암에 올랐던 그다. 무량심은 관세음보살도 몰랐던 초발심자 시절, 3·7일 기도 막바지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귀부인이 관을 씌어 줬다고 한다. 우연은 노력한 이에게 운명이 놓아준 인연이다. 그 뒤 가정과 그의 마음은 평온해졌다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같은 지혜를 전했다. 누구는 깨닫기도 했고, 누구는 여전히 방황했다. 목건련 존자가 물었다. “똑같은 가르침에도 결과가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요.” 부처님은 답했다. “다만 길을 가르쳐 줄 뿐이다. 그 길을 가고 아니 가는 것은 그들 몫이다.”
늦은 오후, 두타산에 안개가 내려앉았다. 관음암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무릉계곡 물소리도 잠잠해졌다. 관세음보살의 금빛미소도 숨었다. 구름과 안개는 하늘을 가렸다. 잠깐 얼굴 내민 이곳의 천년신심이 무릉계곡 안개 품에 안겼다. 아니다. 운무 위에 해는 찬란했다. 잠시 안개로 가려졌지만 관음암에 이르는 길은 그대로였다. 길은 발걸음만 그리워했을 뿐.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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