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사] 엄혹한 시절 순수문학 지키려 사찰로… 바람 길 엿보는 풍경 같은 한 철이었다 (2월3일-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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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3-21 13:38 조회7,573회 댓글0건본문
65 오세영 詩 ‘겨울 노래’의 치악산 구룡사
그 시절이 항상 그러했듯 그해 겨울도 불안하고 불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등교한 학생들은 애초부터 수업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수업이 될 시대 상황이 아니었다. 책 배낭은 일단 동아리 방에다 팽개쳐놓은 채 아크로폴리스 광장(서울대 학생들이 그렇게 부른, 대학 본부와 중앙도서관 사이에 있는 계단식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님을 위한 행진곡’ ‘오월의 노래’ ‘아침 이슬’ 같은 민중가요들을 열창하면 무리는 순식간에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윽고 연구실 안의 내 귀청을 때리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외치는 절규. 고함, 비명, 통곡, 총포 화약이 터지는 폭음, 무언가 깨지는 금속성, 둔탁하게 부딪히는 돌멩이의 굉음, 다급히 쫓고 쫓기는 발걸음, 발짝 소리, 소리들.
출근하면서 이미 수백 혹은 수천 명의 경찰 기동대가 장갑차를 앞세우고 완전 무장에 한 손으론 몽둥이를, 다른 손으론 방패를 든 채 교문 주위에 진을 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터였다. 드디어 그들의 데모 진압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강의실, 도서관, 동아리 방, 화장실, 식당, 교내 서점, 창고 등에 숨어 있던 학생들이 하나씩 붙잡혀 끌려 나오고, 뭇매를 맞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는 그 처연한 비명, 연구실의 방문을 구둣발로 걷어차고 들이닥쳐 학생들을 내놓으라 윽박지르는, 사복들의 험상궂게 흘겨보는 눈의 핏발. 캠퍼스는 물론, 온 건물의 내부에 자욱하게 낀, 매캐하고도 지독하게 쓰라린 최루탄 연기. 그 아수라장.
물론 연구실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바로 아크로폴리스 광장과 면해 있는 방이라서 더 그랬던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눈물, 콧물을 훔치며 간신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내게 와장창 난데없이 유리창을 깨뜨리며 방안으로 날아든 최루탄도 있었다. 그 순간 쓰리고, 아프고,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내장을 움켜쥔 채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던, 그 암담하고 비참했던 기억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시대 상황이 이러니 교수와 학생들은 좌편향으로 클릭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의 권위주의 정권이 극우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수들에게 일방적으로 좌편향된 강의만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식인들, 교수들 가운데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그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대학 언론을 지배하고 학생들의 우상이 되어갔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교수, 침묵하는 교수들은 어용 내지 역사의식에 반하는 사이비 학자로 내몰렸다.
내가 소속돼 있던 국문학과도 예외는 아니어서 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의 방법론에 기초를 두지 않은 학문은 학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문학사에서는 1920∼1930년대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당대 문학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토대해서 창작한 소위 ‘민중문학’이 아니면 진정한 문학이 아니었다.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미국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헤겔주의자나 마르크스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교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제일의 문학으로 치켜세우는 교수가 등장했고 그가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이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그 무렵 나는 전통적으로 문예 창작을 금기시하는 봉직 대학의 분위기가 하도 답답해서 어느 사립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출강을 한 적이 있었다. 강의 자체가 시 창작 지도라서 시간 내내 학생들이 써온 시작품을 읽히고 토론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수강생들이 써온 시라는 것들을 한 번 훑어보니 한결같이 당시 우리 문단에서 유행했던 소위 ‘민중시’ ‘노동시’ ‘통일시’라 불리는 작품들이었다. 나는 그중에서 비교적 잘 쓴다는 학생의 작품 하나를 골라 읽혀보았다. 당장 남북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시로서의 구성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내가 ‘통일도 좋지만 우선 시부터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 지적이 불쾌했던지 그 학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빤히 날 쳐다보며 “교수님은 ‘반통일 세력’이라 그렇게 보지 않느냐”고 했다. 내가 통일에 반대하는 입장이니 자신의 시가 시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전개된 그와의 토론(?).
“내가 왜 반통일 세력인가?”, “가진 자이니까 그렇지요”, “내가 왜 가진 자인가?”, “교수님은 서울대 교수라서 봉급을 많이 받잖아요.(예나 제나 서울대의 교수 봉급은 유명 사립대학의 절반 수준이다)”, “그런데 왜 내가 통일을 반대한다고 생각하나?”, “통일이 되면 서울대학교는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자네 별말을 다 하네. 남한만을 가지고도 그렇게 부(富)를 축적한 정주영 회장도 만약 통일이 되면 자신의 재산을 그 두 배로 늘릴 기회를 가질 것이고, 지금 한반도 반쪽만의 대통령인 노태우 씨도 통일이 되면 한반도 전체의 대통령이 될 것이고, 나는 서울대만이 아닌 김일성대학의 교수까지도 겸할 수 있을 터인데 왜 통일을 반대하겠는가?”
학기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일로 너무 상처를 입어 그만 그 사립대 출강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썼다.
“고려연방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통일은 우선/교류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더니/한 학생이 불쑥 일어나/나더러 ‘반통일 세력’이라고 일갈한다./부동산투기를 근절하기 위해서 만일/국가가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다면/나의 유일한 부동산인 집 한 채를/기꺼이 헌납할 생각이 있는 나인데,/통일을 위해서라면 대학교수직도/기꺼이 물러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인데/25년 교직 경력, 150만원 월수는/이제 가진 자가 되었구나./그렇다. 나는/가진 자이다./집에 가면 나의 사랑하는 강아지 ‘왈패’가 있고/브람스의 음악이 있고/그보다는 아직 티브이의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찔찔/ 흘릴 눈물이 있다./학생들이 떠난/빈 강의실,/홀로 남아 분필을 추스린다./소월(素月)의 허무주의처럼 흑판은/텅 비어 있는데/거기에 가만히 새겨 보는 그대 이름, 아니/산산히 부서진 나의 이름”.(‘소월(素月)을 강의하며’)
이런 시대적 어둠과 학내 분위기, 그리고 학생들의 압박에 떠밀리는 상황에서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그저 끌려갈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를 선택 혹은 결정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시도 학문도 버리고 행동으로 현실에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현실과 거리를 두고 상아탑에 칩거할 것인가. 성격상, 내가 그도 저도 아닌 시류에 편승하면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보기관에 불려가지 않을 정도의―불려가더라도 며칠 감방 신세를 지다가 풀려나올 정도의―좌편향적 현실비판의 제스처를 그럴듯하게 취하면서 적당히 기회주의 처신을 할 수는 없었다. 행동으로 현실에 참여한다면 1970년대의 김지하가 보여주었던 바로 그것처럼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에겐 김지하가 지녔을 것으로 보였던 그 같은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결국 답은 하나, 김지하처럼 현실에 온몸을 던져 행동으로 저항할 용기가 없다면 차라리 후자의 길이라도 성실히 걸으리라. 온 열정을 바쳐 이 어두운 시대를 학문과 창작으로 불 밝히리라. 900여 년 전 몽골이 고려의 전 국토를 짓밟던 그 엄혹한 시절에도 어떤 이는 세상과 등지고 묵묵히 목판에 불경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기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새겨진 팔만대장경이 후대에 민족의 유산으로 길이 살아 숨 쉬지 않던가. 어찌 보면 창을 들고 전장에 나가 몽골 군사 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팔만대장경을 각인하는 일이 민족생존에 더욱 기여하는 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사에서 보듯 비록 국가와 국토를 잃는 비극적 상황이라 하더라도 문화와 언어를 지켜낸 민족은 영원할 수 있었기에 말이다.
▲ 민주화 투쟁으로 뜨거웠던 1980년대, 모교인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오세영 시인은 어설픈 현실 참여 대신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강원 원주 치악산 구룡사에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철을 보내며 연작시 ‘구룡사시편’을 썼다. 사진은 구룡사 입구에 우거진 소나무 숲. 박경일 기자 parking@ |
이와 같은 나의 결심에는 물론 그 수년 전 내가 아직 대전의 충남대학교에 봉직하고 있었을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교수 민주화선언의 주동자로 몰려 한 열흘 ‘충남기업사(보안사충남지부)’ 지하 취조실에서 당해야 했던 고통이 하나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시학(詩學·Poetics)의 기본 전제 역시 내 결심의 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시는 산문(소설)과는 다른 문학장르이다. 산문의 언어는 정보전달의 도구이지만 시의 언어는―도구가 아니라―존재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사물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같은 진흙(언어)으로 만들어진 용기(容器)이기는 하지만 그 용도에 있어 밥그릇(산문문학)과 청자기(시)가 원칙적으로 서로 다른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현실비판이나 사회 고발 같은 내용은―산문문학에서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어차피 시에서는 작품상 성공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 원래 시라는 것이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산문문학과 구별하여 시를 ‘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1920∼1930년대 우리 문단을 휩쓸었던 소위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그 실천적 증거가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어설프게 민중시의 조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차라리 문학(언어)이라도 순수하게 지키자.
나는 그해 어느 겨울방학, 소란스러운 속세를 떠나 그 날로 책 몇 권을 보따리에 싸들고 치악산 구룡사에 찾아들었다. 그리고 한 철을 그곳에서 보냈다. 어떤 때는 일찍 기상하여 새벽 예불에 참석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시자(侍者)와 더불어 법당 앞마당을 쓸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멍하니 요사채의 마루에 걸터앉아 햇빛 공양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계곡의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나 솔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듣기도 하고, 어떤 때는 눈밭에 찍힌 짐승 발자국을 좇아 종일 숲 속을 헤매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시를, 내 정신의 반란을 말씀으로 쓰기도 하였다. 창세기에서도 신(神)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하지 않았던가?
“한 철을 치악(雉岳)에서 보냈더니라./눈 덮힌 묏부리를 치어다 보며/그리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빈 가지에 홀로 앉아/하늘 문 엿보는 산까치같이,//한 철을 구룡(龜龍)에서 보냈더니라./ 대웅전 추녀 끝을 치어다 보며/미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라./흰 구름 서 너 짐 머리에 이고/바람 길 엿보는 풍경(風磬)같이,//그렇게 한 철을 보냈더니라./이마에 찬 산 그늘을 품고,/가슴에 찬 산 자락을 품고/산드릅 속눈 트는 겨울 한 철을/깨어진 기와처럼 살았더니라.” (‘속구룡사시편(續龜龍寺詩篇)’)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가 “너는 왜 그 당시 저항의 칼날을 군중 앞에서 높이 빼 들지 않았느냐”고 내게 돌멩이를 던진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직도 그 시대를 행동으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원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죄인처럼 살아가는 지식인의 한 사람이니까.
오세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시인
기사원문보기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20301033112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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