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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전쟁의 분노도 껴안은 佛法의 터… 평온한 범종 소리 ‘그윽’ (8월19일-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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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08-19 16:19 조회7,3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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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휘 소설 ‘상원사’의 배경이 된 상원사는 강원 평창군 오대산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문수전은 소설 속 한암 스님이 6·25 전쟁 중에 목숨을 걸고 지켜낸 곳이다.

47 선우휘 소설의 배경‘상원사’ 

▲  문수전에 있는 한암 스님 액자 사진.
선우휘의 단편 ‘상원사’는 6·25전쟁 시기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짧은 액자소설이다. 작중 화자인 ‘나’는 상원사를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얘기는 내가 이 몇 년 동안 추구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와 직결되는 것임을 발견했다.’ 화자는 이제껏 시시한 얘기만 하고 바로 그 얘기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펜을 들었다고 한다. 6·25전쟁은 기본적인 교전 규칙도 지켜지지 않는 아수라장이었다. 고전적인 전쟁관에서 성역이라 여기는 사찰이나 예배당도 뺏고 뺏기는 싸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강원 오대산의 사찰들이 북한 인민군의 소굴이 돼서 국군이 피해를 보게 되자 소설 속 주인공인 김 소위에게 사찰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김 소위는 부대와 함께 오대산 대가람 월정사를 먼저 불태운 뒤 상원사에 달려 올라갔다. 그는 승방의 창문에서 나오는 한줄기 불빛을 보고 다가간다. 이때 주지인 한암 스님이 창문을 열었다. 

“절을 태우러 왔습니다.” 

“왜 이 절을 태워야 하지요?” 

“명령입니다.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하니까요.” 

그러자 스님은 가사를 걸치고 나타나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법당에 불을 밝히고 불상을 올려보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를 엮고는 합장을 했다. 곧 사라질 법당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가 싶었다.

“이제 불을 지르시오.” 

스님은 자신은 죽으면 어차피 다비에 부쳐질 몸이니 걱정 말고 불을 지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캬악!” 하는 일갈이 스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 원숭이 같은 늙은 것이. 김 소위가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과 함께 웅크리고 앉은 스님을 그대로 안아 들어 올려 법당 밖으로 내동댕이치려고 할 때였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나는 불제자 곧 부처님의 부하,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그대가 장군의 명령을 따르듯이 나는 부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법당은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순간 가슴에 피어오르던 불길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그는 그대로 불을 질러버리자는 소대원을 제지하고 법당의 문짝을 떼어내게 한다.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부수고 떼어낸 법당 문짝을 끌어다 마당 한가운데 쌓아올리고 불을 질렀다. 그 불길이 대낮처럼 상원사 일대를 밝히는 동안 그는 임무 완료를 외친다. 검은 모순의 덩어리가 부풀어 올라 가슴이 터지려는 아픔을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상원사는 1969년 문예지에 발표된 후 몇몇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이다. 나에게는 아버지인 작가는 이 소설로 오래도록 찬사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모두 아버지를 곤혹스럽게 했다.

작가는 작품에서 김 소위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그 이름조차 모른다고 했고, 독자들도 애써 그를 찾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독자들은 각자의 짐작으로 김 소위를 만들어버렸다. 즉, 김 소위는 선우휘 소설가라는 것이었다. 6·25전쟁에 장교로 참전한 전력이 있는 작가였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작가의 겸손이라고 해석하며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렸다. 그 덕에 비난도 이어졌는데 어느 날 한밤중에 울린 전화는 아버지를 매우 심각하게 만들었다. 

“아, 글쎄, 제가 아니라고요. 제가 했다고 쓴 적이 없어요.” 

전화가 끊어지고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기가 그 전투 때 상원사에 있던 사람이란다. 당신이 아닌데 왜 당신이 했다고 썼냐고. 아직도 작가가 쓴 걸 그 사람 얘기로 아는 사람이 있구나.” 

“소설에서도 김 소위를 1인칭 나라고는 안 했는데?” 

“그러게 말이다.” 

평소 이쪽저쪽에서 욕을 먹다 보니 그 방면으로는 근육 비슷한 것이 생긴 아버지였지만 소설로 욕을 먹는 것은 좀 힘드셨던 모양이다. 아직도 인터넷에는 6·25전쟁 때 상원사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한암 스님에게 감동 받은 선우휘 소위의 용기 때문이라는 기사가 남아 있다. 다른 어딘가에는 육사 출신 김모 소위라고 실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내 추측으로는 그분이 맞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처음 상원사를 찾은 것은 1986년 이맘때였다. 그 여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어느 날 여행 가방 하나 들고 출장을 떠났던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고, 그렇게 갑자기 닥친 아버지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공포였다. 가슴은 점점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으며 모든 것이 허망하고 시큰둥했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온 나라는 들끓었지만 내겐 시시하기만 했고 날은 짜증 나게 더웠다. 그렇게 두문불출한 채 주변 사람들과도 멀어지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친척 동생은 우리 가족에게 상원사행을 권했다. 

그녀는 탄허 스님의 따님으로 그 절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분이다. 한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상원사로 출가, 수행하셨던 탄허 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있는 곳이니 그녀에겐 상원사가 친정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언니, 집에만 있지 말고 애들 데리고 바람 쐬고 옵시다.” 

그녀의 투박하지만 애정 어린 권유로 어머니는 별로 내켜 하지 않는 자식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말려버릴 듯 뜨거운 여름이었다.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로 가는 길,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소설 상원사의 무대가 된 사찰 상원사에 들어섰을 때도 내 마음속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소설 속 계절은 한겨울이었다. 1·4후퇴 때 소대원들이 하얀 입김을 틀어내며 바삭바삭 얼어붙은 마당을 밟고 있었으니 그 또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상원사는 층층이 나무로 울창한 오대산의 그저 작은 절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억불숭유정책을 취한 조선 시대에도 상원사만은 세조에 의해 명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사연, 세조의 피부병을 고쳐준 문수보살과 세조의 옷자락을 물어 자객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준 고양이 이야기를 들으며 고양이 석상 앞을 얼쩡거렸던 것도 같다.

이 첩첩산중이 격전지였다니. 그렇게 멍한 얼굴로 기웃거리다 나는 문수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계단 앞에는 한 스님이 서울에서 온 불자들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있었다. 한암 스님은 우리나라 선불교의 대표적인 분으로, 스님의 지팡이는 단풍나무가 됐고…. 

곧 내가 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6·25전쟁 때 문수전의 전소 위기를 한암 스님이 법력으로 지켜내셨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그 일화를 소설로 썼던 선우휘 씨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순간 그루터기처럼 자리 잡고 있던 슬픔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 작가는 가도 작품은 이렇게 남는구나…. 

얼마 전 나는 상원사를 다시 찾았다. 서울이 끈적거리던 날, 진부 버스터미널에 내리자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알리는 광고판이 보였다. 작은 빗줄기를 맞으며 오대산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는 여전히 덜컹거렸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들어가는 길은 ‘선재길’이라는 이름의 둘레길이 돼 있었다. 꼭 30년 만이다. 전나무 숲 오대산에는 푸른 안개가 덮여 있었다.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란 팻말이 붙은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곳곳에서 다람쥐가 출몰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수풀 사이 숨은 까마귀들은 나무라듯 쉰 소리로 울어댔다. 입구의 청풍루에는 ‘천고의 지혜, 깨어 있는 마음’이라고 쓰여 있다. 들어서자 카페 ‘마루’가 보인다. 절에 카페라니. 상원사는 세련되고 현대적이 돼 있었다. 그 오래전, 대학졸업반이던 내가 역시 대학졸업반인 딸을 동반하고 찾아왔으니 상원사의 세월은 그래도 무던한 편이다. 범종은 호기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고양이 석상도 여전했다. 세월의 풍파로 고양이들이 조금 여위었다고 할까.

나는 문수전으로 향했다. 한암 스님이 전쟁 중에 두려움 없이 지켜낸 곳. 장엄한 문수동자좌상 앞에서 반세기 전 그 자리에 가부좌를 튼 채 합장하고 있었을 스님을 그려 봤다.

‘이제는 스님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스님이 돌이 돼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어떠한 힘도 스님을 법당 마루에서 떼어 놓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김 소위가 불을 지를 수 없게 만든 스님의 모습이다. 한암 스님은 상원사에 들어와 입적하실 때까지 27년간 한 번도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으셨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고 사부대중이 다 떠난 텅 빈 절을 스님은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음은 절과 자신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집착의 대상으로서의 절이 아니라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어차피 절을 태워야 하는 것이 부조리한 전쟁의 법칙이라면 자신도 함께 산화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그 후 김 소위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가 위독한 상태에 빠진 한암 스님을 만나게 됐다. 좌이대사(坐而待死), 즉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스님을 지켜보던 그는 한암 스님이 운명하자 좌이왕생(坐而往生)한 그 모습을 찍어 액자에 담아 상원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임종 당시 한암 스님을 지켜보던 김 소위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작가는 김 소위의 감회를 써서 메울 유혹을 느끼지만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고 했다. 그건 김 소위의 감회를 헤아릴 상상력과 근사하게 묘사할 표현력의 부족이라면서. 나도 그 마음을 측량할 길이 없다.

여러 상념이 오고 갔다. 그런데 소설 속, 법당의 왼쪽 벽에 걸려 있다고 했던 한암 스님의 좌탈입망(坐脫立亡) 사진이 눈에 띄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 월정사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짧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법당을 나왔다. 뒤뜰의 지혜수를 마시니 낮은 하늘이 닿을 듯했다.

작가의 바람처럼 나도 누군가 오대산에 간다면 월정사를 구경하고 선재길을 걸어 상원사를 찾아가 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그윽한 범종 소리에 귀 기울이며 6·25전쟁 때 상원사가 타지 않고 남은 이유를 잠시 생각해 보라고.  

글·사진=선우숙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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