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창간 20주년 초청대법회 선원수좌회 대표 혜 국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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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수동자 (121.♡.203.43) 작성일08-11-01 12:42 조회6,775회 댓글0건본문
[창간 20주년 초청대법회]선원수좌회 대표 혜 국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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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번 헛 절 있을 때 한번의 참 절 나오듯 간절할 때 화두 잡혀
기사등록일 [2008년 10월 28일 17:52 화요일]
정법 믿고 불자 된 사실이 이생의 가장 큰 행복
불성에 대한 믿음 점검하며 부처님께 귀의하라
마음 하나 깨닫지 못해서 나고 죽고 죽고 나기를 몇 번이나 했던고. 내가 내 자신을 가만히 돌아보면, 오늘 이 날이 있을 때까지 과연 축생이 된 날은 몇 번이나 됐었고 소가 돼 밭을 갈았던 일, 지옥에 들어가 고통 받던 일, 사람 됐어도 정법을 몰라 헤매던 일, 그 몇 번이던고.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제가 열세 살에 절에 들어왔습니다. 한 평생 부처님께 바치면서도 정법을 알고 수행 할 수 있을 때 한 시간이라도 헛되이 낭비하지 말자 다짐해보지만 거 참 잘 안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머리를 깎았느냐, 얼마나 수행을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세계관과 인생관이 바로 잡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자면서도 부처님을 떠나지 않고 있느냐하는 것이지요. 이런 얘기를 가지고 함께 탁마를 해보십시다.
제가 요즘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 즉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 등 모든 불보살님들은 씨앗을 심는 것을 좋아하고 중생들은 씨앗을 심는 것보다는 열매 먹기를 좋아한다는 말이지요. 씨앗은 심어만 놓으면 결국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씨앗을 심지 않고 열매만 기다리며 ‘왜 나한텐 열매가 안 오지?’하며 자꾸 불평불만입니다. 본인이 씨앗을 안 심어 놓은 생각은 않고, 열매가 없다고 불평하고 불만스러워하는 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반면 열매는 관계없이 씨앗 심는 것을 부지런히 하는 이를 우리는 불보살이라 부릅니다. 그럼 우리는 과연 불보살들의 행을 본받고 부처가 되겠다는 사람으로서 어떤 씨앗을 심고 있는가. 한 번 되돌아봅시다.
여러분들이 자동차를 타고 가면 운전수가 물론 잘해야 되지만 자동차도 고장이 없어야 합니다. 운전수만 있고 자동차가 없으면 갈 수가 없지요. 우리가 씨앗을 심을 때 즉, 인을 심을 때는 반드시 이 몸뚱이를 통해서 심습니다. 귀신이 우리 몸 안에 있을 때는 정신이라고 하고 몸 밖으로 나가면 귀신이라고 하지요? 전 아직 귀신이 맛있는 아이스크림 사오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정신이 몸뚱이를 심부름 시킬 수 있을 때, 이 몸뚱이라고 하는 심부름 시킬 수 있는 자동차가 있을 때 씨앗을 심지 이 몸뚱이가 없을 때는 씨앗을 심을 수가 없습니다.
몸뚱이도 사람 몸 받았을 때만 정법이라는 씨앗을 심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 몸 받는 것이 어렵습니다. 고로 여러분들이 불자라면 정말 이 몸뚱이가 있을 때 내가 무슨 씨앗을 심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 정법을 믿고 불자가 된 사실을 가장 큰 행복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지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봉행됐던 8.27 범불교도대회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데모라고 하면 무조건 반대했습니다. 왜냐. 내 마음을 먼저 바꾸고 내가 먼저 달라진 후 남을 달라지게 만들어야지 상대방만 바꾸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그러나 이번 범불교도대회는 적극 찬성을 했습니다. 왜냐. 씨앗과 열매의 관계입니다. 인과 과의 관계란 말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우리나라에 지금 기독교와 불교가 팽팽히 맞서있습니다. 만약 지금 불교 세력만큼 이슬람교가 팽팽히 맞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백이면 백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좁은 나라에 남북이 갈려져 있는 것만도 억울한데 남한에서 같은 동포끼리 서로 총질하고 싸우느라고 경제건 대학이건 학문이건 뒷전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전쟁이 종교전쟁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불교의 자비사상 때문입니다. 헌데 성시화 운동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를 믿거나 아니면 떠나라’는 식인데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사실이 오히려 이상하지요. 범불교도대회는 그런 종교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자고, 불교의 포용성을 알고 당신네들도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이 소중함을 알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종교전쟁을 막고 이 민족의 평화와 화합, 사회통합을 위한 몸부림이었지 결코 불교계의 기득권 수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불자들도 아직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범불교도대회야 말로 백성들을 위한 일이고 개신교를 위한 일이고 가톨릭을 위한 일이고 종교전쟁 없는 나라에서 한 번 살아보자고 하는 발원입니다. 그러나 모든 언론이 총무원장 스님 검문한 사건 하나만 가지고 20만 불자들이 그런 것 마냥 호도를 했습니다. 본질은 그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불교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올바른 씨앗을 심을 수 있는지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봅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온 스님들이 붙들려 나갈 때 저는 문경 봉암사에 있다가 자격도 없는 서른세 살 나이에 본사 주지 소임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본사 주지는 만 40세가 넘어야 됩니다. 그 때 도정(道政) 자문위원이라고 도(道)의 정신적인 자문위원을 종교계에서 뽑은 적이 있습니다. 불교,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등 5개 종교에서 두 사람을 뽑는데 신부님 한 분과 제가 자문위원을 맡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묻더군요.
“서른 세 살 어린 스님이 뭘 안다고 자문위원을 합니까.”
“아무리 목사님이 훌륭해도 스님은 못 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사님은 앞으로 30년 정도 더 살지 모릅니다. 당신네 종교는 내생이 없으니 금생 죽으면 끝이지만 스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설사 지금 모자라더라도 다음 생이 있기 때문에 또 다음에 고치고, 또 다음에 고치고 스님들은 수백 년 수천 년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전혀 부족하거나 어리지 않습니다.”
신부님이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한 말씀 보태시더군요.
“진짜 맞는 말이네요.”
그럼 여러분들도 설사 지금 내 부모, 남편, 아내,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마음에 모두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본인은 영원히 그것을 고쳐나갈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영원을 확실히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영원을 믿기 전에 미래와 내생, 과거와 전생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는 시간적 개념으로 아득한 옛일을 말하나 전생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입체적인 세계관을 말합니다. 또 미래하면 아득한 시간만 떠오르나, 미래에 올 시간과 내가 살아갈 인생을 곁들인 것이 바로 내생입니다. 불교의 전생관과 금생관, 내생관은 엄청난 철학입니다. 허나 불자들은 긍지를 갖고 있지 않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씨앗을 어떻게 심느냐를 얘기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금생에 키가 작다고 합시다. 보통 사람이면 작은 키에 실망을 하지만 내생관을 가진 사람은 ‘전생에 잘못으로 인해 금생에 키가 작으니 내생에는 큰 사람을 만들자’하고 서원할 수 있습니다. 여러 공덕을 쌓으면서 말이죠. 내생도 금생으로 가져와 내 것으로 만들어 현재로 할 때 그 내생은 내 것입니다. 허나 내생으로 미뤄두고 금생에 내생이 될 것을 마음에 만들지 않는 사람은 내생이 내 것이 안 되고 새로 태어난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생을 금생으로, 내생을 금생으로 끌어들인다면 전생과 내생이 금생에 하나로 있으니 결코 어디로 갈 생각이 전연 없는 것이지요. 내생의 씨앗을 지금 심고 전생의 씨앗을 다시 지금 내가 심으면, 금생에 내생의 씨앗만 싹트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씨앗까지도 금생으로 싹이 터 현전일념(現前一念)이 됩니다. 현전일념이 되려면 나와 육신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알아봅시다.
이 말은 나와 우주자연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몇 년 전 하버드 대학에서 세미나가 열렸는데 21세기 가장 큰 문제는 환경오염이라 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이런 법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법문하면서 “서울 지엔피가 3만불 올라가고 북한은 지엔피가 3천불밖에 안되는데, 서울은 물도 공기도 못 마시는 반면 평양은 청정하다면 여러분들은 서울과 평양, 어디에 사시렵니까”하고 묻곤 했습니다. 답은 이미 결정된 것이지요. 평양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는 편파적이지 않은 종교이지요. 내 것만 옳고 네 것은 그르다고 하는 그런 사상으로는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불어 살아가자고 하지요. 그 씨앗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발보리심입니다. 벌과 나비를 모두 살생하면 어떻게 되나요. 우리는 맛있는 수박 등 과일을 먹을 수 없습니다. 벌과 나비가 열심히 꽃가루를 옮겨 주기 때문에 우리가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지요. 다시 하버드로 돌아가서, 21세기 환경오염에 대한 하버드대학의 결론은 유일신 믿는 종교관 아래 인간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 생각하고 자연을 하위개념으로 놓고 마구 개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동양의 불교라는 종교를 봅시다. 불교는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를 심어놔야 모든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산소를 만들어 배출해주니까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서울에 올 때마다 세 번 합장을 올립니다. 한 번은 한강, 한 번은 남산의 숲을 보고 합장을 올립니다. 여러분들도 자연에게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합니다. 절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인간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에서 지렁이 한 마리까지도 모두 고마운 존재입니다. 고마움이 마음속에 가득 차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보입니다. 결국 내 가족의 행복지수는 내 마음속에 어떤 씨앗이 자라고 있느냐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입니다. 모든 것이 자신 탓이지요. 운전수라는 내 마음이 내 몸뚱이를 어디로 움직여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소중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입니까. 이 소중한 부처라고 하는 몸뚱이를 만났을 때 도 닦아놓고 다음 생에 내가 받아먹을 수 있는 씨앗을 심는 시간은 천금같이 아까운 시간입니다. 그럼 나는 어떤 씨앗을 심고 있는가. 열매만 찾고 있는가 한 번 돌이켜 봅시다.
그럼 내 몸뚱이를 움직이는 주인이 누구냐.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죽은 시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몸을 움직이는 마음, 영혼이 움직여서 이곳에 왔습니다. 죽은 이와 산 이의 몸뚱이는 같습니다. 다만 그것을 움직이는, 차를 운전하는 운전수가 있느냐 없느냐 차입니다. 운전수는 누구냐. 그 운전수가 행복과 불행과 잘나고 못난 그 모든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요즘 잘 삽니다. 그런데도 행복을 못 느끼고 더 큰 것만 바라보면 행복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행복지수를 키워야 합니다. 그것이 방생입니다. 그렇다면 내 몸통 속에 무엇이 나를 끌고 가고 있느냐. 그것을 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관세음보살을 불러 보십시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온갖 망상이 떠오르지요. 평소보다 훨씬 잘 떠오릅니다. 마음 속 찌꺼기가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 내 온 마음을 바치니 물이 가라앉아서 내 안의 번뇌 망상이 보이는 겁니다. 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움, 원망 모두 땅 바닥에 던져버리고 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내 부처를 받드는 것, 절 그거 진짜 아름답습니다.
저도 손가락을 연비할까 말까 고민할 때 하루 5천배씩 해봤습니다. 만 번의 헛절이 있을 때만이 한 번의 참 절이 나옵니다. 꾸준히 절 하십시오. 그리고 들여다보십시오. 이 뭣고~ 하고 내면의 생각을 보면서 한참 보다보면 나중에 화두에 몰두하게 됩니다. 자신이 환영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어떤 화가가 귀신 그림을 그려 벽에 붙여 두고 3년 만에 돌아와 그 그림을 보고 귀신이 나왔다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 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환영은 내 생각이자 마음의 파장입니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 때 그것이 바로 씨앗입니다.
내 몸통, 그릇 안에 미움, 원망, 나를 위해주기만 바라는 마음, 자포자기, 우울증 등 어떤 불순물들이 많은 지 가만히 돌아보려고 하면 돌아보려는 마음이 자리해서 못 돌아봅니다. 아예 백지상태일 때 잘 돌아볼 수 있지요.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번뇌 망상은 전생에 들었거나 내 두뇌로 기억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바로 지식이지요. 태양이란 진리는 언제나 떠 있지만 구름이라는 지식에 가리면 안 보입니다. 구름만 벗기십시오. 그러면 부처와 본인이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방법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가장 심기 어려운, 즉 모르는 씨앗을 심어봅시다. 참선을 모르는 씨앗을 심는 것이라 합니다. 참선으로 일보 일배를 하며 조주 스님을 찾아갑시다. 왜 뜰 앞에 잣나무라 했을까. 왜 일까 끊임없이 되물읍시다. 조주 스님에 대한 욕이 저절로 나오고 뜨거운 눈물이 무릎을 세 번 적실 때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악에 바쳐 욕이 절로 나와야 하지요. ‘몸통이란 그릇 속에 번뇌 망상이란 도둑이 꽉 차서 주인을 못 들어오게 하는구나. 내가 주인을 내 보낸 동안 번뇌 망상이 내 주인 노릇을 했구나.’ 이 사실을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뭣고, 이 뭣고…. 계속해서 지식을 비워내면 어느 순간 확 화두가 잡힙니다. 그 때까지 가기가 힘든 것이지요. 잊지 마십시오. 화두 참선법은 최상승법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이 마음대로 되길 바라거든 마음을 먼저 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길들이느냐.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씨앗을 심는 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다는 한강, 섬진강, 영산강, 낙동강이 흘러 흘러 모입니다. 그러나 전라도나 경상도 등의 경계는 없지요. 여러분들도 받아들이세요.
눈으로 무엇을 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귀로 무슨 말을 들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가. 내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무슨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가 되물으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하고 부처님 앞에 절을 해야 하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든지 행동으로 수행 정진을 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뭣고. 고로 부처님 법은 여러분을 부처님을 만드는 것이니 이런 씨앗만 듣고 법문만 듣는 사람도 언젠가 부처가 됩니다.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한 번 믿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묻고 정진하며 마음속에 번뇌 망상을 찾아 가만히 들여다보고 하나 씩 하나 씩 지워나가십시오.
정리=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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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 스님은
1961년 해인사에서 출가해 일타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스님은 제주도에 수행 청정도량 남국선원을 개원, 무문관 수행을 실시하며 간화선 수행기풍 확립을 위해 힘썼다. 현재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공동 대표이자 석종사 금봉선원장으로 수행납자와 재가수행자들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고 있다.
971호 [2008년 10월 28일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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