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 소장 조선왕조실록 국내 반환 - 연합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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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화실장 작성일06-08-26 12:18 조회10,318회 댓글0건본문
조선왕조실록 중 성종.중종.세종실록의 표지.
오대산 사고본 47책… 6주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됐던 조선왕조실록이 우리나라에 반환된다.
서울대 관계자는 30일 "도쿄(東京)대학이
소장 중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五臺山) 사고(史庫ㆍ역사서를 보관하던 곳)본 47책을 서울대 규장각에 기증하는 데 양교간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31일 오전 서울대 개교 60주년 및 규장각
창립 230주년 기념 한국학 국제학술회의 축사에서 이 사실을 공개할 예정이다.
반환되는
조선왕조실록은 행정절차 등을 거쳐 약 6주 뒤 도쿄대 귀중서고에서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등록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총
1천893권 888 책)은 임진왜란 이후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강화도 사고 등 4곳에 20세기 초까지 분산ㆍ보관돼 왔으며 이 중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오대산 사고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모두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도쿄대 도서관
귀중서고에 중종대왕실록과 성종실록 등 47책이 소장돼 있다는 사실이 올해초 확인된 이후 양국간 반환 협상이 진행돼
왔다.
서울대는 31일 오후 1시 이태수 서울대 대학원장, 김영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장, 이태진 국사학과 교수 등이 배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반환의 의미와 배경에 대해 설명할 계획이며 도쿄대도 같은 시각에
부총장 주재로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solatido@yna.co.kr
<조선왕조실록과 오대산사고의 실록>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우리가 흔히 '조선왕조실록'이라 부르는 기록물은 이를 편찬한 조선시대
당대의 개념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앞선 왕이 죽으면 그 뒤를 이은 왕이 선대 왕대에 일어난 일들을 편년체로 정리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런 '실록'을 합칭한 현대적 개념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 제1대 왕은 태조 이성계이고, 그의
시호(죽은 뒤에 올린 이름)는 강헌대왕(康獻大王)이므로,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 시대에 완성된 실록은 정식 명칭이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이다.
조선왕은 모두 27명이 재위했으므로 27가지
실록이 존재함이 '정상'이다. 다만, 우리가 흔히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면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실록의 두 가지는 빼버린다. 마지막 두 왕에
대한 실록이 엄연히 있음에도 고의로 누락시키는 까닭은 이 두 실록이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코너에는 이 두 실록을 지칭해 "이들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실록 편찬 규례에 맞게 편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의 왜곡이 심하여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 성격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기댄 '역사관'일 뿐이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조선왕조실록에 포함시켜야 한다. 고종 이전 실록이 조선사람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해서, 그런 실록이
고종-순종실록에 견주어 특별히 역사적 객관성에 입각해 작성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선조실록과 현종실록, 경종실록의 경우, 실록 판본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권력을 농단한 당쟁 세력들이 서로
자기 입맛에 맞게 역사를 난도질하는 바람에 빚어진 촌극이다.
통상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그 기록의 방대함과 세밀함을 무기로 들어 조선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기록문화를 이룩했다고 자랑하곤 한다. 하지만 조선에 실록이 만들어지던 그
시기에 유럽에서는 이미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조선왕조실록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아시아 전통적인
의미의 사서(史書)가 아니라, 그 초본이나 원고본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웃 중국이나 일본 역대
왕조가 조선왕조보다 특별히 못나서 우리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은 난삽함을 면치
못하는 구석이 허다하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객관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아야지, 무턱대고
실록을 무기로 내세워 우리 민족은 세계 최고의 기록문화를 구가했다고 자랑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실록은 대체로 목활자로 인쇄한다. 조선초기에 실록은 2벌씩 인쇄되어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분산 소장됐다. 그러다가 세종 21년(1439)에는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2벌씩을 더 인출해 전주와
성주에 사고(史庫)를 신설해서 그곳에도 봉안하니 이를 조선초 사대사고(四大史庫)라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나머지 사고는 불타고 오직 전주사고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오로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전라도가 왜적의 침입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를 교훈 삼아 임란 이후 조선왕조는 사고를 깊숙한 산중으로 옮기니,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강화도 사고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사고는 조선왕조 패망과 함께 생명을 다했으며 이 와중에 상당한 실록이 훼손되거나 멸실됐다.
현재는 남한에 강화 정족산본 실록 1천707권 1천187책과 오대산본 27책 등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고,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태백산본 1천707권 848책이 보관돼 있으며 모두 국보 151호로 일괄 지정돼
있다.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도 적상산본 실록을 보관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북한은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의 주도로 남한보다 먼저 실록 국역사업을
완료함으로써 남한 역사학계를 일대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남한에서 부랴부랴 실록 완간을 밀어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국외에는 조선총독부 시대에 일본에 반출된 오대산본 47책이 있다. 오대산본은 관동대지진
때 거의 소실되었으나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이 살아남아 도쿄대 총합도서관에 들어갔다.
이번에 서울대가 도쿄대에서 기증 형식으로 반환받기로 합의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오대산 사고본이다. 이 실록은 한일병합 이후인 1913년, 데라우치 당시 조선총독 재임 시절 도쿄대로 옮겨졌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한 시대에 일본으로 나간 우리의 문화재는 덮어놓고 '약탈' 혹은
'강탈'당한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은 물론이고 학계에도 팽배해 있다. 하지만 정작 약탈 혹은
강탈을 입증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소수에 해당한다. 1876년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 고문서를 가져간 프랑스 군대의 행위는 명백히
약탈이다.
그러나 해외 반출 문화유산 상당수는 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기증이라는 형식을 빌려
가져갔다. 일부가 지난 96년에 경남대에 기증된 데라우치 고문서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나아가 식민지시대 당시에 조선은 '대일본제국'의 일부였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우리는 못내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문화재가 간 행위는 '해외 반출'이 아니라 '국내
이동'이었다.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의 반출 경위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분석이 있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서 그것을 국내로 반환받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탈' 혹은 '강탈'한 우리 문화재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방식은 외려
우리의 문화유산을 영영 우리 손에서 떼어놓게 된다. 그래서 이런 해외 소재 문화유산 귀환에 대해 요즘은 '기증'이라는 형식을 많이 빌린다. 주는
사람도 기분 좋아야 하고, 받는 사람도 기분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홍제성 기자 =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일본으로 넘어간지 93년만에 `기증'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은 한국측의 꾸준한 노력과 일본측의 성의가 빚어낸
`윈-윈'(win-win) 해법으로 풀이된다.
관동대지진으로 1923년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오대산 사고본 중 47책이 일본 도쿄(東京)대학 귀중서고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부터 우리나라 불교계, 시민단체,
정치권 등은 이를 돌려받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올 3월 불교계를 중심으로 출범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는 실록 환수를 위해 도쿄대와 수차례 협상 테이블에 앉았으며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과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 등도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의 노력을 통해 도쿄대는 한국측의 절실한 입장을 확인했으나
최근까지도 "문부과학성, 문화재청, 외무성 등 관계당국과 협의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요구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히는 데
그쳤었다.
도쿄대가 신중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한국측 압력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줄 경우 일본 내
우익 세력이 강력 반발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환수위가 1913년
이뤄진 조선왕조실록 반출이 국제법상 불법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반환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소송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밝혀 도쿄대로서는 큰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칫 일제 강점기에 대규모로 이뤄진 문화재 반출의 국제법상 적법성
여부에 대한 논란이 빚어져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쿄대의 이런 고민은 마침 개교 60주년을 맞은 서울대가 양국의 대표적 국립대 간 학술교류협력 차원에서 고문서를 기증받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2004년 법인화된 도쿄대가 학교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갖게 돼 일본 정부의 정치적 부담이 덜어진 점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됐다.
서울대 관계자는 "양교 간 협력사업을 통해 정치적 부담을 덜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 냈다"며 "적극적인 학술교류를 약속한 양교
총장님들의 합의가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실록 반환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온 불교계와 환수위측은 조선왕조 시절 월정사가 오대산 사고(史庫) 관리를 맡아 왔다는 점을 근거로 "반환되는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이 아니라 월정사가 소장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독도 문제,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문제 등으로 양국의 정치적 관계가 경색된 상태에서 이뤄진 이번 반환은 한일 양국이
최근 수년간 꾸준히 추진해온 `비정치적' 교류협력의 결실로 평가된다.
백충현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30일 "문화재 반환에는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이 있고 기증도 그 중 하나"라며 "도쿄대가 힘든 결심을
했으며 우리측도 성숙하고 차분한 자세로 남은 절차를 무리없이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법 전문가로 문화재 반환에 폭넓게 관여해 온 그는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문화재를 돌려주려는 상대편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며 "입증하기 어려운 일방적 주장을 내세우거나 정치선동이나 국민감정을 앞세우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