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오대산에 와야한다(1) - 강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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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화실장 작성일06-08-26 12:39 조회9,292회 댓글0건본문
-760여책 주문진항 통해 도쿄대로 반출
일제가 약탈해 가 도쿄(東京)대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오대산사고본(五臺山史庫本) 조선왕조실록 47책. 이 귀중한 문화재가 다음달 중순경 서울대 규장각으로 돌아온다. 약탈 93년만에 우리나라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그러나 부적절한 반환 방식과 돌아오는 곳이 서울대 규장각으로 돼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 지정돼 있는 귀중한 역사서이자 문화재. 그래서 원 소재지였던 오대산사고로 돌아오지 않고 서울대로 가는 것이 강원인들에게는 아쉬움을 더한다. 따라서 도와 강원인에게는 오대산사고로 반환돼야 하는 정당한 논리를 내세워 반드시 되찾아와야할 과제로 부각됐다. 오대산사고의 역사와 이곳에 소장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의 실태, 환수위원회의 출범과 활동, 도쿄대로부터의 반환 방식의 문제, 오대산으로 환수돼야 하는 정당성과 보관 시스템 보완 사항 등을 기획시리즈로 보도한다.
오대산사고의 소재지는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번지.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 중간지점 조금 못미친 (3㎞ 지점) 곳 좌측 길옆에 영감사안내판과 나란히 오대산사고지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서있다. 산길을 따라 1㎞를 오르면 거대한 위용을 지닌 사고가 나타난다.
이곳 오대산사고는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한 곳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을 보관하기 위해 선조 39년(1606년)에 처음 세웠다. 최초 건립 당시 실록각(實錄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건물)등의 건물을 세우고 그옆에 수호사찰(守護寺刹)로 영감사도 세웠다. 사고 관리사무소 역할도 함께 했으므로 영감사를 사고사(史庫寺)라 칭하기도 했다.왕실에서는 오대산 사고 설치와 함께 월정사주지를 오대산사고 관리를 총괄하는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總攝)으로 임명했다.
오대산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의 `선원보략 봉안사적(璿源寶略 奉安事蹟)'편에는 “선조 39년 선원보략과 사고를 중대(中臺) 남쪽 호령봉 아래에 옮겨세우고 인신(印信)을 하사, 총섭을 설치하여 이를 수호토록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인신(印信)은 월정사(성보박물관)에 전해지고 있는 `밀부(密符·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신표)'로 오대산 사고를 관리·수호하는 실록수호총섭으로 월정사주지를 임명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오대산 사고 건립당시인 선조39년, 새로 인각한 사조실록(思潮實錄)을 이곳에 보관하였으며 참봉 두사람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후 오대산사고지는 오대산이 소백산 가야산과 함께 삼재(三災:화재, 풍재, 수재)가 들지않는 곳이라고 이중환의 `택리지'에서의 설명처럼 400년간 무사히 보존돼 왔다.
하지만 국권을 상실한 후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실록을 일본으로 가져가 오대산사고는 요즘처럼 텅빈 건물만 남게되었다.
6·25전쟁 때 영감사를 비롯해 사고의 모든 건물이 월정사가 그랬던 것 처럼 `인민군의 은신처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국군에 의해 불태워져 소실, 주춧돌만 남았었다.
이곳 오대산사고지는 1963년 1월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적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지난 1989년 문화재청이 `선원보각'을 다시 세운데 이어 1992년 실록각(현재는 `史庫' 현판이 달려있음)을 복원해 옛모습을 다시 보이게 됐다. 복원당시 사고의 옛사진을 토대로 고건축 전문가들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건축됐다. 앞서 1960년대초 `실록각' 자리에 영감사가 중창되었으나 실록각을 복원할 당시 영감사를 `선원보각' 뒤로 옮겼다.
조선왕조실록은 본래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03년)의 역사를 기록한 1,893권, 888책의 방대한 역사서다.
조선 초기에는 2벌씩 목판으로 인쇄해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분산 소장했다. 세종 21년(1439)에 2벌씩을 더 만들어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신설해서 보관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만 남고 모두 모두 불타 없어졌다. 선조 39년(1606)에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재인쇄, 모두 4벌의 실록을 더 만들어 1벌은 한양의 춘추관에 두고 강화도 마니산,경상도 봉화 태백산, 평안도 영변 묘향산,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해 각각 1벌씩 나눠 보관했다. 이때 원본이된 전주본이 마니산으로 갔고 오대산에는 전주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교정본이 왔다. 임진왜란 이후 가장 먼저 복원된 오대산사고본은 전주사고본의 오자와 탈자가 표시돼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는게 학계의 견해다.
오대산사고본은 선조39년(1606)부터 실록 수호 사찰인 월정사가 관리해오다,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강탈한 다음해인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에서 오대산사고의 서책을 강제로 접수했다. 일본 역사학계가 조선통치전략 수립을 위해 조선총독부에 조선왕조실록을 요청하자,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이를 받아들여 1913년 시로토리(白鳥庫佶) 도쿄대교수와 함께 오대산본 760여 책을 오대산 진고개를 넘어 주문진항을 통해 도쿄대에 반출했다.
원로 학자인 최승순율곡학회이사장은 “조선총독부의 주도하에 인부들이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등짐으로 지고 진고개를 넘어 주문진항에 대놓은 배에 옮겨 싣고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월정사주지 정념스님은 일제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을 가져간 이유로 “오·탈자를 바로잡은 교정본으로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되는 실록이기에 일제가 한국지배연구를 하는데는 더없이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념스님은 또 “`선원보각'에 있던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이 일본 황궁에 보관돼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도쿄대 도서관으로 반출, 보관돼 있던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당시 외부로 대출되었던 것만 남겨지게됐다. 이중 27책은 1932년 5월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27책이 정족산본 1,181권, 태백산본 848권과 함께 1973년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고, 훈민정음과 함께 197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된 것이다.
이번에 도쿄대에 남아있던 47책이 마저 돌아오게돼 현전하는 것으로 확인된 오대산사고본은 모두 74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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