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리는 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엄기종 작성일07-12-10 13:18 조회8,327회 댓글0건본문
93년만에 오대산 전나무숲을 만나는 조선왕조실록
(의제21 새소식지 제출용)
일제가 1913년 오대산 사고지에서 조선왕조실록을 훔쳐갔다.
지게 150짐으로 나누어 연곡면을 통해서 주문진항에서 기다리던 도적선으로 옮겨 도쿄대로 도적질을 한 것이다.
150짐을 주문진까지 지게로 지고 가려면 동대산 북향의 산등을 넘는 지름길을 택했을 것이다. 주문진까지는 약 35km이고 그 중의 산중 길은 최소한 20km로 50리 길은 2교대의 지게꾼을 동원하였을 것이고, 인부들과 일본순사의 식량과 식수를 따로 지고 따라야 할 인부가 10명당 1인 정도로 셈한다면 짐 나르는 인부 300명과 주먹밥 나르는 인부 80명을 포함해서 총 380명의 조선인들이 지게꾼으로 동원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380여명의 짐꾼을 감시하려면 100여명의 왜놈들이 일장도를 철거덕 거리며 행렬 사이에 끼고 앞뒤를 철통같이 지켰으리라.
도적들은 훗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세계의 보물이 되리란 것은 몰랐겠지만 그 귀중한 가치는 미리 알았을 테고, 저들 주머니에 이 보물을 슬쩍 집어넣으려 했으니 강제로 동원하여 무거운 짐을 지켜 끌고 가면서 짐꾼들에게 얼마나 호령을 쳤겠는가.
내 나라 보물이 태백준령을 넘어 동해 바다 쪽으로 강제로 옮겨지고 있다면 아무리 무지몽매하고 순진한 산역 사람들이라도 도적놈들이 왜국으로 도적질 한다는 기미를 알았을 테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부역의 고통은 둘째치고라도 내나라 국보의 도적질에 자기가 직접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얼마나 비통한 심사였겠는가. 옛날에는 왕의 장사를 치르고는 묘역 일에 참가했던 인부들을 생매장 시켰다는 데 구린 일을 시켰으니 짐꾼인들 온전했을까. 아니면 몇 사람을 본보기로 매질을 하며 입막음을 했으리라.
그 날 일장도의 날카로운 감시 앞에 조선왕조실록을 지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힘없는 조선의 백성 380여명은 우리 조상들이었다. 그 분들의 손자뻘 되는 후손들이 지금 우리들이다.
지금으로부터 93년 전의 일이다. 대수로 따지면 3대가 지난 세월이다. 그 날의 분노에 치를 떨었던 조상들의 후손이라면 3대를 오대산 주변에서 사셨던 주민이 대부분이었으리라.
8월 11일 그 도적질 당했던 보물 중에 일부만 오대산사고지로 돌아왔다. 생각하면 무력하게 잃었던 슬픔이 깔려 착잡하면서도 참으로 기쁜 일이다.
93년의 강제 외출에서 집을 찾는 우리의 보물의 생명이 대견스럽다.
내 것을 찾겠다고 다짐하고 찾아오고야마는 환수위원회의 집념과 노고가 얼마나 컸겠는가.
오대산사고본은 선조39년(1606) 선원보락과 사고를 중대 남쪽 호령봉 아래에 옮겨 세우고 인신(印信)을 하사하여, 총섭을 설치하고 이를 수호토록 하였다. 인신(印信)은 월정사에 전해지고 있는 밀부(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신표)로 오대산 사고를 관리‧수호하는 실록수호총섭으로서 월정사주지를 임명하였던 것이다.
오대산 사고지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나라를 세운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25대에 걸친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로서 총74책 중에서 27책이 1923년 경성제국대학으로부터 이관되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고, 나머지는 관동 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고 속였던 47책이 환수위원회의 노력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고, 훈민정음과 같이 197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472년의 너무도 긴 역사가 이 국보를 만든 기간이다.
그 유명한 다보탑 등을 포함한 불국사를 만든 기간은 30년이고, 달에서 보이는 지구의 구조물로는 만리장성 밖에 없다는 장성도 BC221년부터 12년간 쌓았다. 기간문화재로서 우리 조선왕조실록의 472년이란 긴 역사를 세계 어느 곳에서나 아무도 따를 수가 없다.
필자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서기 725년에 만들어진 올해 1,281살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 범종을 주제로 한 수필로 신인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유명한 에밀레종보다도 46년이나 앞서는 상원사 범종이 왜 평창군에 있으며, 그 연대를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태고의 종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무엇인가가 주요 내용이었다.
왜 472년의 期間文化財가 평창군에 있어 평창군과 緣을 맺었는가.
왜 그것이 돌아와 강탈의 아픔과 사연을 이곳에 돌아와서 고하여야만(告由祭) 하는가.
무더운 2006년 8월 11일 돌아온 우리의 고난의 역사를 만나기 위하여 월정사 경내의 환국축하행사장에는 발붙일 자리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93년의 비통을 함께 나누고 그 환국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였다. 월정사 입구의 천년 푸른 전나무 숲길의 조선왕조실록을 실은 채녀와 취타대 행렬 이 지나는 길에도 인파가 모였다. 그리고 93년간 그 신선한 전나무숲 내음을 잃었던 조선왕조실록의 탄성을 들었다.
강제로 왜놈의 답답한 지하 창고에서 먼지를 쓰고 강탈의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우리의 보물은 고향 전나무의 향내를 얼마나 그리워했겠는가.
사고지에서 고유제가 시작되면서 맑은 하늘에 비가 쏟아졌다.
채여에 실린 실록이 일주문에서 전나무숲을 따라 월정사에 도착하고 실록이 축하제단에 오르자 떨던 빗방울이 멈추고 햇살이 비췄다. 일제 강탈의 슬픔과 환국의 기쁨을 하늘도 아는가 보아 필자는 갑자기 떠오르는 글귀를 팜프렛 여백에 메모하여 시 한 수를 적었다.
제목 : 조선왕조실록 전나무 숲으로 오던 날
오대산엔 밀부(標信密符)가 왕권을 떼어준다
군사 동원의 힘은 전쟁터의 창끝처럼 날카롭다.
나는 새도 돌아보지 마라
수호군의 눈초리가 밤낮 없이 번득인다.
남으론 계곡물이 타오르는 산불을 막고
동으론 개미 한 마리 기어오르지 못할 관망
서으론 난공불락의 호령봉 줄기줄기
북으론 印信의 수호꾼의 선원보락이 섰다.
권리는 민중으로부터 오고
맡긴 일은 역사에 남을 일이며
민중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칼을 채운다.
육천사백만자의 기록 앞에 오만을 떨지 마라.
1913년 백오십개의 지게 짐은
사백여명의 부역꾼의 등에 업혀서
동산 넘고 바다건너 암울한 비린내를 맡으며
강점의 지하에서 먼지이불에 얼굴을 묻는다.
천년 전나무 숲을 아는가 그 향내를 맡아 보았는가
강자의 사타구니로 기는 먼지가
콧구녕을 메우고 아득히 잊혀가는 신선한 내음
93년 전의 아련한 전나무 숲 모습이 아른거린다.
청천하늘에 비가 쏟는다.
영감사 골짝에 잃었던 장자가 돌아 왔는가.
오열의 눈시울을 흘리지 마라
하늘만 펑펑 반겨 울어라.
취타를 앞세운 가마가 온다.
전나무 숲은 저리도 춤을 추누나
월정사 석탑 앞엔 총섭(守護總攝)의 不眠이 비로서 감긴다.
역사를 담아온 오동상자 위로 빗방울이 멈췄다. 해가 비춘다.
빼앗긴 역사가 돌아오던 날 꽤나 뭉클한 마음으로 글을 써보았다.
로마를 찾고 중국 곡부의 공묘를 찾는 것도 거기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의 12년간 만든 만리장성은 년 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드린다.
세계인의 축제인 2014동계올림픽을 염원하는 군민의 기개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우리의 보물을 이제는 단단히 지켜야만 한다. 얼마 전 돌아온 정문부 선생님의 의병활동으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병이 격파당한 승전비로서 일본으로 강탈당하였다가 되찾아온 북관대첩비도 함경도 길주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하여 북한으로 보냈지 않았던가. 역사의 장소로 돌려보내듯 조선왕조실록의 보호를 명받고 삼재가 없는 오대산 자락에 서고를 짓고 곰팡이 피랴 좀벌레 먹으랴 도적이 들랴 노심초사 지켜왔던 역사의 현장인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온당하다.
청주에는 서기 1377년(단기 3710년, 고려 우왕 3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가 두 권 중에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 1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찍은 목판본 3부와, 흥덕사‧취암사 필사본 각 1부가 남아 있으나, 이곳엔 1992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자랑하기 위하여 고인쇄박물관이 개장 되었다. 평창군에도 실록박물관이 생겨 우리의 역사가 세계만방에 자랑스럽게 펼쳐져야만 한다.
중앙집권보다는 지방이 더 중요하다는 지방화의 거센 물결이 시작한지 오래이다.
지방의 보물들이 서울로 끌려가 마당 한 귀퉁이에 처량하게 진열되던 시절은 옛 얘기이다.
문화재가 태어났던 역사의 현장에 있도록 하고 그 자리에서 보전되어야 그 진가가 나는 것이다. 필자는 중앙의 고궁이나 박물관의 외진 곳에 지방의 귀한 문화재가 끌려가 있어 고향 주인을 부르는 처량한 소리로 들리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무관심은 다 잃어버려도 무얼 잃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관심을 갖고 조선왕조실록이 자기 자리를 바로 찾아 그 자리에서 영원토록 휴식을 취하며 세계만방에 그 가치를 발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실록을 또 빼앗기고도 말 것인가.
(의제21 새소식지 제출용)
일제가 1913년 오대산 사고지에서 조선왕조실록을 훔쳐갔다.
지게 150짐으로 나누어 연곡면을 통해서 주문진항에서 기다리던 도적선으로 옮겨 도쿄대로 도적질을 한 것이다.
150짐을 주문진까지 지게로 지고 가려면 동대산 북향의 산등을 넘는 지름길을 택했을 것이다. 주문진까지는 약 35km이고 그 중의 산중 길은 최소한 20km로 50리 길은 2교대의 지게꾼을 동원하였을 것이고, 인부들과 일본순사의 식량과 식수를 따로 지고 따라야 할 인부가 10명당 1인 정도로 셈한다면 짐 나르는 인부 300명과 주먹밥 나르는 인부 80명을 포함해서 총 380명의 조선인들이 지게꾼으로 동원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380여명의 짐꾼을 감시하려면 100여명의 왜놈들이 일장도를 철거덕 거리며 행렬 사이에 끼고 앞뒤를 철통같이 지켰으리라.
도적들은 훗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세계의 보물이 되리란 것은 몰랐겠지만 그 귀중한 가치는 미리 알았을 테고, 저들 주머니에 이 보물을 슬쩍 집어넣으려 했으니 강제로 동원하여 무거운 짐을 지켜 끌고 가면서 짐꾼들에게 얼마나 호령을 쳤겠는가.
내 나라 보물이 태백준령을 넘어 동해 바다 쪽으로 강제로 옮겨지고 있다면 아무리 무지몽매하고 순진한 산역 사람들이라도 도적놈들이 왜국으로 도적질 한다는 기미를 알았을 테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부역의 고통은 둘째치고라도 내나라 국보의 도적질에 자기가 직접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얼마나 비통한 심사였겠는가. 옛날에는 왕의 장사를 치르고는 묘역 일에 참가했던 인부들을 생매장 시켰다는 데 구린 일을 시켰으니 짐꾼인들 온전했을까. 아니면 몇 사람을 본보기로 매질을 하며 입막음을 했으리라.
그 날 일장도의 날카로운 감시 앞에 조선왕조실록을 지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힘없는 조선의 백성 380여명은 우리 조상들이었다. 그 분들의 손자뻘 되는 후손들이 지금 우리들이다.
지금으로부터 93년 전의 일이다. 대수로 따지면 3대가 지난 세월이다. 그 날의 분노에 치를 떨었던 조상들의 후손이라면 3대를 오대산 주변에서 사셨던 주민이 대부분이었으리라.
8월 11일 그 도적질 당했던 보물 중에 일부만 오대산사고지로 돌아왔다. 생각하면 무력하게 잃었던 슬픔이 깔려 착잡하면서도 참으로 기쁜 일이다.
93년의 강제 외출에서 집을 찾는 우리의 보물의 생명이 대견스럽다.
내 것을 찾겠다고 다짐하고 찾아오고야마는 환수위원회의 집념과 노고가 얼마나 컸겠는가.
오대산사고본은 선조39년(1606) 선원보락과 사고를 중대 남쪽 호령봉 아래에 옮겨 세우고 인신(印信)을 하사하여, 총섭을 설치하고 이를 수호토록 하였다. 인신(印信)은 월정사에 전해지고 있는 밀부(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신표)로 오대산 사고를 관리‧수호하는 실록수호총섭으로서 월정사주지를 임명하였던 것이다.
오대산 사고지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나라를 세운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25대에 걸친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로서 총74책 중에서 27책이 1923년 경성제국대학으로부터 이관되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고, 나머지는 관동 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고 속였던 47책이 환수위원회의 노력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고, 훈민정음과 같이 197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472년의 너무도 긴 역사가 이 국보를 만든 기간이다.
그 유명한 다보탑 등을 포함한 불국사를 만든 기간은 30년이고, 달에서 보이는 지구의 구조물로는 만리장성 밖에 없다는 장성도 BC221년부터 12년간 쌓았다. 기간문화재로서 우리 조선왕조실록의 472년이란 긴 역사를 세계 어느 곳에서나 아무도 따를 수가 없다.
필자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서기 725년에 만들어진 올해 1,281살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 범종을 주제로 한 수필로 신인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유명한 에밀레종보다도 46년이나 앞서는 상원사 범종이 왜 평창군에 있으며, 그 연대를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태고의 종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무엇인가가 주요 내용이었다.
왜 472년의 期間文化財가 평창군에 있어 평창군과 緣을 맺었는가.
왜 그것이 돌아와 강탈의 아픔과 사연을 이곳에 돌아와서 고하여야만(告由祭) 하는가.
무더운 2006년 8월 11일 돌아온 우리의 고난의 역사를 만나기 위하여 월정사 경내의 환국축하행사장에는 발붙일 자리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93년의 비통을 함께 나누고 그 환국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였다. 월정사 입구의 천년 푸른 전나무 숲길의 조선왕조실록을 실은 채녀와 취타대 행렬 이 지나는 길에도 인파가 모였다. 그리고 93년간 그 신선한 전나무숲 내음을 잃었던 조선왕조실록의 탄성을 들었다.
강제로 왜놈의 답답한 지하 창고에서 먼지를 쓰고 강탈의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우리의 보물은 고향 전나무의 향내를 얼마나 그리워했겠는가.
사고지에서 고유제가 시작되면서 맑은 하늘에 비가 쏟아졌다.
채여에 실린 실록이 일주문에서 전나무숲을 따라 월정사에 도착하고 실록이 축하제단에 오르자 떨던 빗방울이 멈추고 햇살이 비췄다. 일제 강탈의 슬픔과 환국의 기쁨을 하늘도 아는가 보아 필자는 갑자기 떠오르는 글귀를 팜프렛 여백에 메모하여 시 한 수를 적었다.
제목 : 조선왕조실록 전나무 숲으로 오던 날
오대산엔 밀부(標信密符)가 왕권을 떼어준다
군사 동원의 힘은 전쟁터의 창끝처럼 날카롭다.
나는 새도 돌아보지 마라
수호군의 눈초리가 밤낮 없이 번득인다.
남으론 계곡물이 타오르는 산불을 막고
동으론 개미 한 마리 기어오르지 못할 관망
서으론 난공불락의 호령봉 줄기줄기
북으론 印信의 수호꾼의 선원보락이 섰다.
권리는 민중으로부터 오고
맡긴 일은 역사에 남을 일이며
민중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칼을 채운다.
육천사백만자의 기록 앞에 오만을 떨지 마라.
1913년 백오십개의 지게 짐은
사백여명의 부역꾼의 등에 업혀서
동산 넘고 바다건너 암울한 비린내를 맡으며
강점의 지하에서 먼지이불에 얼굴을 묻는다.
천년 전나무 숲을 아는가 그 향내를 맡아 보았는가
강자의 사타구니로 기는 먼지가
콧구녕을 메우고 아득히 잊혀가는 신선한 내음
93년 전의 아련한 전나무 숲 모습이 아른거린다.
청천하늘에 비가 쏟는다.
영감사 골짝에 잃었던 장자가 돌아 왔는가.
오열의 눈시울을 흘리지 마라
하늘만 펑펑 반겨 울어라.
취타를 앞세운 가마가 온다.
전나무 숲은 저리도 춤을 추누나
월정사 석탑 앞엔 총섭(守護總攝)의 不眠이 비로서 감긴다.
역사를 담아온 오동상자 위로 빗방울이 멈췄다. 해가 비춘다.
빼앗긴 역사가 돌아오던 날 꽤나 뭉클한 마음으로 글을 써보았다.
로마를 찾고 중국 곡부의 공묘를 찾는 것도 거기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의 12년간 만든 만리장성은 년 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드린다.
세계인의 축제인 2014동계올림픽을 염원하는 군민의 기개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우리의 보물을 이제는 단단히 지켜야만 한다. 얼마 전 돌아온 정문부 선생님의 의병활동으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병이 격파당한 승전비로서 일본으로 강탈당하였다가 되찾아온 북관대첩비도 함경도 길주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하여 북한으로 보냈지 않았던가. 역사의 장소로 돌려보내듯 조선왕조실록의 보호를 명받고 삼재가 없는 오대산 자락에 서고를 짓고 곰팡이 피랴 좀벌레 먹으랴 도적이 들랴 노심초사 지켜왔던 역사의 현장인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온당하다.
청주에는 서기 1377년(단기 3710년, 고려 우왕 3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가 두 권 중에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 1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찍은 목판본 3부와, 흥덕사‧취암사 필사본 각 1부가 남아 있으나, 이곳엔 1992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자랑하기 위하여 고인쇄박물관이 개장 되었다. 평창군에도 실록박물관이 생겨 우리의 역사가 세계만방에 자랑스럽게 펼쳐져야만 한다.
중앙집권보다는 지방이 더 중요하다는 지방화의 거센 물결이 시작한지 오래이다.
지방의 보물들이 서울로 끌려가 마당 한 귀퉁이에 처량하게 진열되던 시절은 옛 얘기이다.
문화재가 태어났던 역사의 현장에 있도록 하고 그 자리에서 보전되어야 그 진가가 나는 것이다. 필자는 중앙의 고궁이나 박물관의 외진 곳에 지방의 귀한 문화재가 끌려가 있어 고향 주인을 부르는 처량한 소리로 들리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무관심은 다 잃어버려도 무얼 잃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관심을 갖고 조선왕조실록이 자기 자리를 바로 찾아 그 자리에서 영원토록 휴식을 취하며 세계만방에 그 가치를 발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실록을 또 빼앗기고도 말 것인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