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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실록 반환’ 반갑지만 일본에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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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화실장 작성일06-08-26 14:09 조회9,0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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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5월30일 서울대에서 깜짝 발표’가 있었다.

일본 도쿄대 도서관에 소장중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47책이 한국에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그날은 불교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환수위) 대표단이 도쿄대 도서관장과의 ‘담판’을 위해 일본에 출국하던 날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발표에 환수위쪽도 당황했고, 국민들도 어리둥절했다. 애초 환수위와 도쿄대 도서관의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어 ‘소송’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미 환수위쪽은 일본서 재일동포 김순식, 이춘희 변호사를 선임해 놓은 상태였다. 여기에 ‘조선불교도연맹’의 지지성명,‘재일본거류민단’과의 연대, 김원웅·노회찬 의원 등 국내 정치권의 가세로 도쿄대와의 ‘일전’을 코앞에 둔 상태였다.

환수위도 몰랐던 서울대의 발표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취재결과 서울대의 ‘반환’ 발표는 15일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환수위와의 협상이 한참 진행중인 5월15일, 도쿄대의 사토 부총장이 서울대의 정운찬 총장을 긴급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사토 부총장은 도쿄대 총장의 친서를 정 총장에서 전했다. 친서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을 서울대학교에 기증하겠다”는 것이었다. 정 총장은 즉각 ‘태스크포스팀’의 결성을 지시했고, 이태진, 이근관 교수등이 참여한 팀이 결성됐다. 그 뒤 양국을 오가는 이메일과 팩스를 통해 의견 조율이 이루어졌고, 보름 만인 30일에 ‘깜짝발표’를 하게 된것이다.

‘환수위’ 압박에 급했던 일본, ‘기증’은 최선의 방책

일본은 그동안 ‘환수위’의 압박에도 꿈쩍하지 않더니 왜 갑자기 일을 처리했을까? ‘서울대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의 이태수 위원장(대학원장)은 “문화재 반환의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예전의 외규장각도서처럼 난항이 될 수 있었다”며 “일본쪽에서도 시간을 끌면 법적 소송에 휘말리고 약탈 문화재라는 여론이 악영향을 낳을 우려 때문에 ‘기증’이란 방법을 통해 서두른것 같다”고 말했다. 오항영 국가기록원 기록관리표준설계팀장도 “약탈 문화재란 것이 일본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며, “반환청구 소송에 휘말릴 경우 복잡한 외교문제로 발전하는 것을 일본이 사전에 차단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기증’이라는 방법은 일본이 선택한 가장 손쉽고 조용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문화재를 ‘반환’해야 하는 문제는, 국제법상으로 복잡한 논의가 있어야 하고, 외규장각 도서의 사례처럼 단기간에 이루어지기 힘들다는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태수 위원장은 “반환의 경우 국제법상으로 검토할 사항이 너무 많아서, 기증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빨리 문화재를 찾아오기란 힘들다”라고 말했다.

백충현 서울대 명예교수(국제법)도 “식민지 시대 반출된 문화재 반환의 경우 현재 소유자, 반출 경위, 시점 등에 따라 복잡한 문제를 따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불교계의 입장은 달랐다. 환수위 위원장인 정념 스님(월정사 주지)은 “그것은 서울대의 논리일뿐”이라며 “이 기회를 빌어 반출 문화재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는데 서울대가 너무 급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일본 오가며 환수운동 불 지핀 환수위 “우롱당했다”

불교계는 3월 3일 정념 스님(월정사 주지)과 철안 스님(봉선사 주지)을 공동 의장으로 하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본격적인 환수 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갑작스런 서울대의 발표에 정작 환수위는 ‘뒷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당혹한 환수위는 31일 일본 현지에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의 반환을 환영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냈다. 성명서에서는 “환영한다”며 일단 의미는 부여했지만 “〈조선왕조실록〉이 ‘불법 약탈문화재’라는 것이 입증된 상황에서 도쿄대가 제안하고 서울대가 실록을 기증형식으로 받기로 한 것은 자기 물건을 남에게 기증받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또한 “서울대는 도쿄대의 제안을 역사의식 없이 전격 수용함으로써 남북한 불교도, 일본 동포사회, 국민모두의 지지와 연대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승리’의 영광을 퇴색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금 일본에 의해 농락당하고 타협한 1965년도의 상황으로 우리역사를 후퇴시킨 것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라며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정념 스님은 “불교계와 서울대와의 ‘자중지란’으로 비추어질까 염려스럽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대가 기존 환수위가 한 노력들과 경과들을 다 알고 있었을 텐데, 마치 ‘밀실협약’처럼 연락 한번 없이 일을 처리한 것이 모양새가 ‘부도덕’ 하다”며, “지금 일본에 가 있는 환수위 대표단은 ‘멋적은’ 상황이다. 환수위가 우롱당한 느낌”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정념 스님은 또한, “이 문제는 단순히 문화재를 찾아오자는 차원이 아닌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약탈당한 문화재를 되찾아 오는 선례가 될 수 있었다”며, “2일 환수위 대표단이 귀국하면 협의후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서울대는 왜 그동안 일본에 반환 요청을 하지 않았고, 환수위 활동에 참여를 안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록’ 반환 뒤 어디로? 소장 장소 놓고 서울대-불교계 줄다리기 할듯

일단 ‘오대산사고본’은 서울대쪽에 반환되게 된다. 현재 양쪽의 실무진에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중이다. 이태수 위원장은 “빠르면 6주 안에 실록이 돌아올 수 있다”며 “구체적인 방안은 협상중이지만, 비행기를 통해서 일본이 직접 가져오는 형태가 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실록이 도착하면 불교계와의 진통은 본격적으로 시작 될 가능성이 있다. 소장처를 어디로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기존 오대산 사고본 중 27책은 아직 서울대에 있으며, 실록은 예전부터 규장각에서 관리해왔다”라는 입장이고 월정사 쪽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원래 소장처인 오대산 사고로 돌아와야 한다”라는 입장이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도 1일 “서울대가 ‘일본 쪽 에선 기증, 한국 쪽에선 환수’라는 표현 방식에 합의한 것은 약탈 문화재를 반환받을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스스로 부인한 치욕적인 일”이라고 비판하는 등 ‘실록’이 한국에 돌아와도 ‘논란’은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조선왕조실록 반환 일지

-3월 3일 조계종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과 서울 봉선사 주지 철안 스님을 공동 의장으로 하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출범.

-3월 15일 월정사 재무국장 법상 스님, 노회찬(민노당) 국회의원, 문만기 환수위 실행위원장 등 5명이 일본 도쿄대를 방문 첫 협상을 함. 이때 정식으로 반환 요청서 전달

-4월 17일 2차 협상. 도쿄대 "재산처분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환수에 난색 표시. 5월31일 3차 협상 약속.

-5월 15일 도쿄대 사토 부총장 서울대 정운창 총장 방문. 도쿄대 총장 친서 전달.

-5월 30일 서울대 ‘오대산 사고본’반환 발표. 같은 날 환수위 대표단 3차 협상차 출국.

-5월 31일 서울대 ‘오대산 사고본’반환 공식 기자회견

조선왕조만큼 기구한 조선왕조실록, 오욕의 역사

“오대산본은 복사본으로 실록 편찬 과정연구 등 사료가치 높아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일본 도쿄대까지 흘러가게 되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역사서다.

조선시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기록되어 있으며,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왕조의 상세하고도 철저한 기록이다. 실록의 편찬은 사관이라는 관직을 둬 독립성을 보장하고,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철저하게 보장했다. 왕도 함부로 실록을 열어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사료가 완성되면 특별히 설치한 사고(실록을 보관하던 창고)에 각 1부씩 보관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1900년대 초까지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의 사고에 남아 전해져 왔고,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경성제국대학(오늘날 서울대)으로 이관되었다가 해방 뒤 서울대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적상산 사고는 옛 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었다가 한국 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이 보관하고 있는 사본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옛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로 이관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 등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오대산 사고본은 태조부터 명종까지 실록은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 새로 인출한 교정본을 보관하고, 선조부터 철종까지 조선왕조의 역사를 담고 있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1911년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 사고본을 강제로 접수하였고, 이중 가장 완전한 오대산 사고본은 1912년 도쿄대 교수였던 시로도리가 도쿄대로 강제로 이송했다. 일본으로 간 오대산본은 1923년 9월1일 관동대지진으로 불에 탔는데, 다행히 연구실에 대출했던 73책이 남았다. 이 가운데 46책은 도쿄대가 그대로 소장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문화재청의 조사와 배현숙 계명문화대 교수의 현지 조사로 밝혀졌고, 나머지 27책은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알수 없으나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고 있다. 도쿄대에 보관된 오대산본은 중종실록 29책, 선조실록 8책, 성종실록 9책 등이다.

박한남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은 “흩어진 오대산본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오대산본은 교정본으로 가필이나 교정의 흔적을 엿볼 수 있어 실록 편찬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박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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