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사명 스님(1544~1610)
속성 임任. 본관 풍천豊川. 자 이환離幻. 호 사명당泗溟堂:四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명 임응규任應奎. 유정은 법명惟政. 증형조판서 수성守城의 아들.
경남 밀양密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휴정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 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때 명나라 장수 마귀와 함께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가 되었다. 1604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열반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사명당의 부도와 비는 해인사 홍제암에 있다.